한국일보

[삶과 생각] 그리운 “김실아 보아라”

2024-05-16 (목) 김두련/뉴저지 포트리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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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아버지 생각을 한다. 사면이 붉고 푸른 사각무늬가 가지런히 그려진 항공봉투 속에는 무겁지 않고도 걱정이 묵직이 담긴 아버지의 편지가 들어있다.
“김실아 보아라”로 시작된 글에는 엄마와 형제들의 모습이 가지런히 보이고 가까운 일가친척들의 소식이 시작된다.

아무개도 무고하고 뉘댁도 평안하고 재 너머 무슨 띠 누구는 우환 중에 있고 멀리 금산면 이모댁 돼지 소식까지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줄에서 “잘 있거라” 한마디로 마침표가 느닷없이 찍혀버린다. 보고 싶다, 고생하지? 뭐든 한마디는 있을 뻔도 하건만 30년 가까이 쉬지 않고 날아오던 개나리 소식은 어느 해 배달되지 않았고 그리고 영원히 두절되었다.

그동안 나는 무심한 세월의 배를 타고 뉴욕에 닻을 내려 바느질 모르는 바느질집 사장이 되었고 한국의 언니는 부모님의 바램처럼 사모님이 되었다. 그리고 떠나 사는 나는 어쩐지 부모님의 아픈 손가락이 되어버렸다. 지금 두분은 모든 것 내려놓으시고 고향 진주에서 유유히 흐르는 남강(南江)을 내려다 보시며 평생 누려보지 못하셨을 쉼을 영원히 누리신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몇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두 분 떠나 사는 막내딸 걱정에 아옹다옹 다투시는가? 또 돌아다 보았다.
겨울이면 중절모에 검정색 길고 무거워 보이는 오버를 입으셨다. 각진 오버의 어깨선처럼 아버지는 엄하였다. 우리 오남매는 한 줄로 서서 단체로 기합을 받기도 했다. 언니의 대답을 따라 하면 회초리를 피하는 행운도 나에게 때로 있었다.

그때의 회초리는 우리의 손바닥을 때리신 것이 아닌 송곳으로 아버지의 가슴을 찌르는 아픔이었음을 왜 몰랐을까? 어렵고 배고팠던 시대에 오남매를 키우시면서 속으로 삼키셨을 그 진한 눈물을 왜 몰랐을까?

이맘 때가 되면 나는 두 번 운다. “김실아” 불러주시던 다시 받아볼 수 없는 그 편지가 그리워서 울고 풍운아처럼 살다 가신 아버지가 가슴 저리게 보고싶어 운다.

은퇴를 하고 일에서 물러난 나는 시니어센터에 입학하여 이제 공립학교 유치원생이 되었다. 나에게 노인이 된다는 것은 대학입시보다 어려웠다. 처음 얼마간 스쿨버스에 앉으면 표현 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나를 어지럽혔다.

교실에 들어서면 내 이름 석자가 단정히 씌여진 명찰을 가슴에 달고 출석부에 이름도 적고 선생님의 호령에 맞추어 보건체조도 하고 이렇게 나의 하반기 인생수업이 어리둥절 시작되었다.

살아있기에 행복하지 않은가? 내일보다 오늘이 좋다. 어제보다 오늘은 더 좋다. 이 순간까지 용하게도 버텨온 주름진 얼굴, 굽은 등과 마주 앉으면 따뜻한 연민을 느낀다. 그리운 것 있고 보고싶은 것이 있음도 살아있기에 품어볼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걱정스러웠던 막내딸도 이제 흰머리 희끗희끗한 초로(初老)의 노인이 되고도 그리움에 웁니다. “김실아! 다시 한 번 불러주세요. 수십 년 목에 걸려있던 한마디를 이제사 세상 밖으로 내어놓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저의 고백이 너무 늦어 죄송하고요. “아버지, I Love You.“

<김두련/뉴저지 포트리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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