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가 을

2023-11-16 (목) 임일청/미주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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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든 미네와스카 호수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다시금 가을 들판이 그리워 길을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부드러운 낙엽이 쌓인 호젓한 산길을 걷거나, 아니면 갈대가 우거진 널따란 들판을 보고 싶었지만 정작 발길이 머문 곳은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자그마한 공원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가을을 느낄 수는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붉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청아한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온몸을 노랗게 단장한 은행나무와 캐나다 단풍나무가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또한 키가 큰 고로쇠나무, 우아한 벚나무, 이파리가 핏빛처럼 새빨간 단풍나무, 빨강색과 노란색이 기막힌 조화를 이룬 예쁜 느티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찬란한 가을의 아름다움에 동참하고 있다.

단풍은 나무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뿌리에서 올라온 수분을 더 이상 나뭇잎에 공급하지 않게 됨에 따라 이파리는 광합성 작용을 멈추게 되고, 수분이 고갈되면서 내재해 있던 멜라닌 색소가 외부로 표출되는 자연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단풍은 결국 나뭇잎의 종말을 알리는 표시이다. 하지만 그 끝을 알리는 신호가 너무나도 곱고 아름다우며 환상적이다.


미국으로 이민 온 첫 해에는 낙엽이 발목까지 빠지는 레니어 마운틴의 산길을 걷기도 했었고, 파아란 연기와 함께 그윽이 피어오르는 낙엽의 향기가 그리워 습기 머금은 단풍나무 잎사귀들을 모아 장작 위에 얹어놓고 벽난로의 불을 지펴보기도 했었다. 비발디의 ‘가을’ 과 함께 한 시애틀의 낙엽 향기는 이곳 뉴욕에 와서도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있었다.

호숫가에 놓인 기다란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이파리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언젠가 친구가 들려준 재미난 낙엽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자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가을날 혼자서 고궁에 산책을 나갔다가 나무 밑에서 낙엽을 줍고 있는 어떤 여성을 보았다. 한 장 한 장 차분히 낙엽을 주워 모으는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선생님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저어기, 무엇 좀 물어보아도 될까요? ” “네? ”
“다름이 아니라, 그 낙엽들을 모아서 무엇을 할 것인지 좀 가르쳐 주세요.” “아, 그거요...... 그건 낙엽에게 직접 물어보시지 그러세요. “

그 대답이 너무도 가슴에 와 닿았기에 그 길로 구애를 하기 시작했고, 얼마 뒤에는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 여행길에서 이제는 자신의 신부가 된 그 여자 분에게 처음 만난 날 낙엽에 대해 물었을 때 어떻게 그렇게 멋진 대답을 할 수 있었느냐고 기대감을 가지고 물었다. 그러나 신부는 애석하게도 자신이 그런 대답을 한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의 느낌은 어떠했을런지…….

동산에 낮게 걸린 하현달, 불어오는 소슬바람, 끝없이 높고 푸른 하늘, 커피향 가득 머금은 낙엽 태우는 냄새, 바람에 맞춰 리드미컬 하게 흔들리는 늘씬한 갈대, 말할 수 없이 그윽한 들국화 향기, 코스모스 흐드러지게 핀 시골의 기차역, 사각거리며 거리를 구르는 나뭇잎들의 노래, 오펜바흐의 첼로곡 재클린의 눈물……. 가을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향기로움.....

애절하면서도 고운 선율로 밤마다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귀뚜라미 앙상블의 바이올린 소나타 E 플랫 장조 알레그로 모데라토와 함께 가을은 점점 깊어만 간다.

<임일청/미주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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