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 론 - 작은 재판

2023-01-20 (금)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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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판사님이 들어오시니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보안관의 지시에 따라 방청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입장하는 판사를 향해 예의를 표하였다. 판사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젊은 여성으로 그가 입은 검은 법복은 여판사의 하얀 얼굴과 조각같은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판사는 추운 날씨에도 재판에 참석해주어 고맙다는 인삿말과 함께 가벼운 농담으로 딱딱한 법정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영어와 함께 스패니시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보아 이민자의 딸로 자라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했음을 짐작케 하였다.

판사는 사건번호별로 원고, 피고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출석 체크를 하였다. 원고 또는 원고와 피고 양측 모두 안나온 경우에는 재판 불출석으로 케이스 종료를 선언하고 피고가 안나온 경우에는 원고승소 여부를 확정짓기 위한 ‘디폴트’ 절차를 밟도록 지시하였다.


사건의 성격에 따라 중재를 통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재판을 받는 대신 원고와 피고를 재판정 앞에 별도로 마련된 중재실로 보내 중재전문 변호사의 중재로 사건을 해결하도록 하였다. 이를테면 돈 300 달러 때문에 다투다가 재판정에까지 오게 된 원고와 피고는 바로 중재실로 보내졌다. 디폴트와 중재케이스를 모두 걸러낸 후 남아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첫번째 케이스는 3000 달러에 화장실 개보수 작업을 계약하고 작업이 끝났는데도 돈을 1000달러 밖에 받지 못했다며 콘트랙터(Contractor)가 집주인을 상대로 낸 2000달러 배상 소송이었다. 판사는 양측에서 제시한 증거서류를 검토한 후 원고의 부실공사를 사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두번째 케이스는 유명 가전제품 매장에서 1300달러 주고 산 세탁기가 불량품이어서 환불을 요구하였으나 6개월이 나도록 환불을 받지 못했다며 소비자가 전자제품 매장을 상대로 낸 소송이었다.

양측의 증거서류를 검토한 판사는 1300달러가 원고의 은행구좌로 틀림없이 환불조치되었으며 다만 원고의 데빗카드 분실로 카드번호가 바뀌면서 원고의 통장에 돈이 입금되지 않았을 뿐 돈은 원고의 은행에 있으니 원고가 은행측과 협의하여 환불을 받도록 판결하였다.

케이스번호 SC 005XX Chae vs Maxxx Maxx.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판사의 호명에 따라 앞으로 나가 오른 손을 들고 진실만을 증언하겠다는 선서를 하였다. 판사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나는 자동차 엔진을 고치기 위하여 피고가 운영하는 정비업소에 맡겨 수리를 의뢰하고 14일 후 3000달러와 세금을 지불하고 차를 찾아왔으나 엔진 수리가 안되어있어 다시 정비업소를 찾아가 고쳐줄 것을 요구했다는 것과 업소 주인이 폭언과 함께 재수리 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판사는 수리비 영수증과 차가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물을 제시토록 하였다. 나는 영수증과 함께 정비업소 주인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그리고 타 정비업소에서 발행한 엔진 이상진단서 등을 제시하였다. 서류를 검토한 판사는 원고의 주장과 증거서류가 일치하고 믿을만 하므로 피고는 원고에게 수리비 전액에 소송비용을 합쳐 지불할 것을 판결하였다.

작은 일이지만 정의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잘못 고친 차를 다시 고쳐달라는 고객의 정당한 요구에 아시안 운운하며 인종차별적인 폭언을 서슴지 않던 경우없는 업소주인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않고 그대로 지나간다면 그는 같은 잘못을 계속해서 고객들에게 저지를 것이다. 아무쪼록 그가 이번 일을 교훈삼아 좋은 비즈니스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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