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발언대 - 한 해의 마지막 길목에 서서

2022-11-30 (수) 노재화/전 성결대 학장·사회학
크게 작게
지난 달말부터 구세군의 자선냄비를 위한 ‘사랑의 종’소리가 울리고, 많은 거리들과 다수의 가정, 그리고 교회와 성당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되고, 백화점 등에 크리스마스 대바겐세일이라는 현수막을 보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세모(歲暮)가 다가옴을 피부로 느껴진다.

12월이 되면 미국의 작가 오 헨리(본명 William Sydney Porter)의 〈The last leaves, 마지막 잎새, 1905〉가 떠오른다. 뉴욕의 여류화가인 존시는 폐렴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던 중 담장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담쟁이덩굴잎을 보면서 그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체념하게 된다.

아래층에 사는 원로 화가 베어만은 오랫동안 한 편의 그림도 못그리고 술로 나날을 보내면서 살아왔다. 그랬던 베어만이 존시를 위하여 밤새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붓으로 정밀하게 담장위에 덩굴잎을 그린 후에 이틀만에 폐렴으로 죽고 만다. 폭풍우 속에서 다음 날에도 마지막 한 장만 남아 있는 덩굴잎을 보면서 존시는 기력을 되찾게 된다.


존시의 동료 수우는 이 마지막 잎새가 베어만이 생전에 그리고 싶었던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평했다.
벽에 덜렁덜렁 붙어 있는 마지막 12월달 캘린더를 본다. 금년의 시작도 엊그제 같은데 붙잡을 수도 없이 가는 세월과 그 끝이 보이지 않았던 긴 터널 속에서 마지막 잎새처럼 생명력을 가지고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흔히들 청년때에는 세월이 안간다고 생각했었지만, 1년을 10세에는 1/10, 50세에는 1/50, 70세에는 1/70으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빠르게 흐름을 느끼게 된다.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폴자네(Paul Janet, 1823-1899)는 이것을 시간-수축효과(Time-Compression Effect)라고 했다. 또한 네델란드 심리학자 드라이스마(Dauwe Draaisma, Why Life Speeds Up As You Get Older!,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는 세월의 속도를 나이 곱하기 2라는 공식으로 제시한다.

즉 나이 20대이면 40마일, 60대이면 120마일로 엄청나게 빠름을 느끼며 이러한 속도의 배가현상을 흥미롭게 만원경 효과, 회상효과, 생리시계효과 등으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일이나 가슴이 뛰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나만의 시간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세대별로 시간-수축효과이든 세월의 속도와는 달리 우리의 시계는 하루 24시간, 한주일, 한달, 1년씩 넘어가며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100년이 다가오면 말세라고 했다. 그런 연유에서 17, 18, 19세기의 세기말적 풍조 속에 새로운 철학과 문학 사조들이 탄생되었고, 희망차게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할 수 없지만,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회전이 아니라 하루, 한주일, 한달, 일년을 세어가면서 바람직한 매듭과 단락을 지어가며 새로운 미래의 꿈과 기대속에 이어 살아온 것이 인류의 발달사였다.

2022년 한해만 보더라도 국내외적으로 세계적인 염병 코비드-19과 변종 바이러스의 창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기후변화와 지진, 홍수, 인종간의 갈등과 총기사고, 요동치는 세계 경제, 그리고 한국내에도 새로운 정권의 탄생과 이태원 참사와 같은 크고 작은 롤러코스트같은 행불행가운에 한 시도 마음 놓거나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 시대를 잘 버텨왔다.

우리의 삶에는 누구에게나 짧거나 긴 터널은 있지만 끝이 없는 터널은 없다. 그 터널에서 우리 자신에게 처한 현상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노력과 인내와 기다림, 즉 버티기와 긍정적인 믿음만 있으면 어떠한 터널도 통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사가 아닌가 말이다.

이제 어느 시인의 독백처럼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 하기보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며/한 해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나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남에게 마음 닫았던 한 해의 잘못도 뉘우치면서 겸손하게 나머지 시간에’ 삶의 매듭과 단락을 잘 짓는 것이 오늘을 사는 지혜자가 아니겠는가.

<노재화/전 성결대 학장·사회학>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