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 미팅

2022-10-31 (월)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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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채팅앱이나 카톡 같은 SNS를 통해서 젊은이들이 이성교제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만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반세기 전만 해도 셀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라서 젊은 남녀가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되어있었다.

고등학교때까지 금단의 문처럼 굳게 닫혀있던 이성교제의 문은 대학입학과 동시에 활짝 열리게 된다. 갓 성인이 된 젊은이들이 해방감을 만끽하며 통과의례처럼 제일 먼저 치르는 이벤트가 ‘미팅’이다.

미팅은 주로 과 대표가 상대방 학교의 과대표와 만나 주선하는데 보통 평일이나 주말 오후시간에 시내 다방에서 만나게 된다. 특히 첫번째 미팅은 생전 처음으로 미지의 이성을 만난다는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많은 젊은이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고있던 우리 과의 한 친구는 첫 번째 미팅에 나가기 위해 세탁소에서 양복을 빌려 입고 하루 전날 이발소에도 다녀오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 친구가 미팅 장소에 도착해서 과대표가 나눠준 파트너 쪽지를 펼쳐보니 ‘안토니오’라고 적혀있었다. ‘클레오파트라’ 쪽지를 가진 여학생이 파트너로 정해진 것이다. 이 친구 기대감에 가슴을 설레며 클레오파트라를 찾았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생김 생김이 클레오파트라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여학생이었다.

초장부터 김이 샜으나 그렇다고 내색할 수도 없는 일, 차를 마신 후 둘은 덕수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궁 입구에 있는 매점을 지날 때 여학생은 아이스크림이 먹고싶다면서 아이스크림 바 두개와 과자 두 봉지를 집었다. 당시는 데이트 비용을 모두 남자가 부담하던 시절이라 이 친구가 돈을 내야했다.

덕수궁을 한 바퀴 돌고나와 거리를 걷다가 오뎅을 파는 길거리 매점이 나오자 여학생은 오뎅이 먹고 싶다면서 오뎅을 주문했다. 돈은 또 이 친구가 냈다. 여학생과의 대화 소재로 쓰기위해 준비한 ‘헤르만 헷세’나 ‘모차르트’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보지도 못했다.

미팅으로 한 달 용돈을 모두 날려버린 이 친구는 그 후 일주일동안 끙끙 속앓이를 해야 했다.
필자도 그날 설레는 마음으로 첫 미팅에 나갔는데 공교롭게도 파트너로 정해진 사람이 그중 키도 크고 미스코리아 뺨치는 팔등신 미인이었다. 오죽하면 친한 친구 녀석이 자기 파트너하고 바꾸자고 군침을 흘렸을까. 아무튼 한껏 기분이 부푼 나는 주머니를 털어 고급 식당에라도 데리고 가려고 호기있게 같이 나가자고 제안을 했다.

말없이 나를 따라나선 여학생은 버스정거장이 나오자 집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뒤도 안돌아보고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아야했다. 사실 필자는 키가 남들보다 10센치는 작은 편이라 늘 또래 여자들이 정해놓은 신체검사 커트라인을 넘지 못했다.

더구나 그날 만난 여학생은 영화배우처럼 늘씬하고 잘생긴 미인이었으니 나같은 사람이 얼마나 같잖게 보였을까. 그렇다 해도 좀 너무하다 싶은 것이 같이 살자는 것도 아니고 젊은이들이 처음 만나 차 한잔 마시고 이야기하는 것뿐인데…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 여학생이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차버린 것이 오히려 고맙고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때 같이 밥먹고 차마시며 정이 들어 그 여학생과 인연을 맺었다면 어찌되었겠나.

나같이 왜소한 추남과 그녀처럼 골 비고 허영에 찬 여자가 만나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어떤 모습일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서 인생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않던가.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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