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 주말도 아니고 주중에(수요일), 퇴근후도 아니고 애매한 오후 시간대에(4~6시), 음식은 고사하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안되고 숫제 반입조차 안된다니, 코비드19 이상없음을 증명하고 마스크를 써야 입장할 수 있다니, 물러가나 싶었던 그 괴질이 돌연 되돌아서 시시때때 둔갑술(변이)로 방역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사납게 땡깡을 부리는 마당에, 그놈 하나 대적하기도 벅찬데 저 못지 않게 고약한 낯선 괴질(원숭이두창)과 떼로 와서 따로 또 같이 행패를 부리는 판국에…
그래도, ‘탄허학 박사 1호’ 문광 스님(조계종 교육아사리 겸 동국대 HK연구교수)이 “한류를 만드는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주제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은 지난 3일 오후 북가주 강연장(쿠퍼티노 디앤자 칼리지 포럼3)은 거의 꽉 찼다. 얼추 120명. 분위기도 진지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노트에 받아적거나 휴대폰에 쟁여넣거나 함께 웃거나 박수를 치거나…
미주현대불교(발행인 김형근) 창간 33주년 기념행사 일환으로 기획된 문광 스님의 미국순회강연 중 첫번째인 북가주 이벤트는 PD와 비디오감독이 포함된BTN불교TV 취재팀이 전과정을 여러 대의 무비캠에 담는 가운데 약 1시간 본강 뒤에 근 1시간 질의응답을 덧댄 형식으로 진행됐다. 전공분야는 달라도 부전자전 선구적 학자로 널리 알려진 문광 스님(포항공대 명예교수 등을 지낸 선친 권오봉 선생은 퇴계학의 선구적 대가)은 이틀 뒤 6일 저녁에는 LA한국문화원에서 강연했다. 여기서는 UCLA 한국불교학 프로그램을 맡을 석좌교수직 신설을 위한 모금활동이 병행됐다. 문광 스님이 난생처음 미국강연을 위해 한국어와 영어로 쓴 150쪽짜리 맞춤형 가이드북(한류의 근원, 한국학과 한국불교 / The Origin of the Hallyu(Korean Wave), Korean Studies & Korean Buddhism)을 주제별로 간추려 연재한다.
◇동서문명의 회통시대 : 21세기 지구촌은 화합과 소통, 상생과 융합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사상과 종교계가 서로 대화하고 화합하여 그동안의 대립을 종식시키고 온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천하무이도(天下無二道)요 성인무양심(聖人無兩心)이라. (이 세상에는 두 도가 없으며 성인에게는 두 마음이 없다.)
모든 성인의 마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한 생각 일으킨 뒤의 마음이 하나라는 뜻이 아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전 소식, 희노애락의 감정을 일으키기 전 소식,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기 전 소식, 생각이 끊어지고 선악시비가 붙을 수 없는 바로 그 마음의 본체자리를 증득하신 분들이 성인이기 때문에 모든 성인들의 마음에 두 마음이 없다고 한 것이다. 결국 석가 공자 예수와 같은 성인들은 무심을 증득했기 때문에 두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나니라”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여기서 말씀(Logos)은 서구사상의 근원이 된다. 선불교를 거친 한중일 동아3국에서는 선지를 바탕으로 ‘그 말씀의 이전 소식’을 문제삼는다. 화두참선법이다. 예를 들어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추방되기 이전의 마음, 선악과 시비의 분별이 끊어진 인간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의심해 들어가는 수행법이다. 하나의 화두를 가지고 하루에 천번만번 의심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화두가 일념상태가 되어 오직 화두 한 생각만 지속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다른 생각이나 분별심이 붙지 못한다. 이렇게 의심삼매가 지속되어 몇날몇달 지속되다가 보는 찰나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나서 시비선악의 분별을 일으키기 전의 자신의 본래면목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이 마음의 근본자리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언어 문자가 완전히 끊어진 것으로 최고의 성인들도 입을 열 수 없는 세계이다. 요한복음의 그 말씀은 언어 문자가 끊어진 말 없는 말, 즉 무설설(無說說)이다. 한 마음도 없음이 모든 성인의 스승이 됨이요, 한 생각 일으킴이 일체 죄업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의 고승인 탄허(1903-1983)는 예수의 부활보다 더 중요한 예수의 근본정신은 마태복음 산상수훈에 나오는 “마음을 비우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이라 하였다. 현대 성경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중국에서 19세기에 서양선교사들이 번역한 것을 보면 (탄허스님 말씀처럼) “虛心者福矣”(허심자복의)로 돼 있다. 이 허심과 영성을 탄허스님은 기독교의 근본이라 하였다.
이제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인간의 근본 마음자리인 텅 빈 무심의 자리에서 함께 손을 맞잡고 인류의 스승, 위대한 성인들의 공통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부 성령 성자의 삼위일체는 불교 화엄학에서 말하는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일불과 다르지 않다.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부이고 무엇이 법신인가?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 소식, 생각 끊어진 자리를 말한다. 그것은 언어 문자로도, 그 어떤 지식과 학문으로도 짐작조차 할 수 없고 오로지 마음을 허공과 같이 텅 비워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무심삼매 자리에서만 증득할 수 있다.
오늘 이렇게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서구유럽의 기독교문명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이제는 지난날의 폐습인 내가 옳다는 아상은 모두 내려놓고 허심으로 상대문명을 이해하고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가슴을 열고 대화하기 시작했다. 전 지구촌이 하나로 융합하여 행복한 천국과 극락을 이 지상에 건설해야 할 때가 왔다. 동서문명의 회통과 화합을 발원한다. <18일자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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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