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만사 - 이웃사촌

2022-07-26 (화)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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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촌이란 말은 이웃을 사촌처럼 가깝게 생각하라는 말이다., 예수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선포함으로 이웃의 거리감을 완전히 타파하였다. 본래 한국인은 떡을 해도 이웃과 나누어 먹을 정도로 가까웠는데 개인주의의 발달로 차차 이웃이 멀어졌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악수가 주먹 부딪침으로 변하였다. 악수가 생긴 것은 서로 손을 펴 보여 내가 무기를 안 들었다는 것을 보이는 평화의 상징인데 주먹이 평화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일본인은 동네를 도나리구미(鱗組)로 나누어 전국민을 조직화하였었고 한국도 그것을 배워 애국반으로 나누었다. 이웃사촌과 같은 정을 내세운 조직이 아니라 국민 통솔을 위한 전국민 조직화였다. 이것은 평화체제가 아니라 전시체제이다.


한국인은 끼리끼리병이 있다. 대학가도 동아리라는 것이 있어 취미별로 뭉친다. 출신도끼리 뭉치는 지방색 그룹도 있고 운동을 함께 하는 그룹, 술 자리를 함께 하는 그룹도 있다. 끼리끼리 놀면 재미있지만 역시 분열상이어서 단결의 힘이 약화된다.

한국인의 특색은 정이었다. 정들면 이별이란 말이 있다. 감정이 가까워지고 서로 따뜻해지는 사랑의 정서를 한 마디로 정이라고 불렀다. 노래 가사에 마음 주고 정도 주고라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 정서가 정이다. 영어로는 번역이 안 되는 말이어서 영문에서는 그저 Jung이라고 쓴다.

내외가 오랫동안 함께 사는 것이 사랑으로 사느냐 정으로 사느냐 하는 것은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사랑과 정이 비슷한데 사랑은 보다 설명적이고 정은 보다 감정적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과 “당신에게 정이 들었어요”라는 말은 비슷한 것 같아도 느낌이 다른 표현이다.

사랑 행위를 ‘정사’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랑이란 정에서 출발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이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이 들면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단계에 이르면 정은 최고조에 이른 것이다. “정도 주고 사랑 주고”가 나의 모든 것을 주었다는 표현이 된다. 남녀가 만나 한 평생을 살려면 정과 사랑을 다 주는 사이여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짝사랑의 자유이다. 혼자 사랑하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노틀담의 꼽추’란 단편소설이 있다. 노틀담 사원의 종을 치는 이 인간은 세상 모든 남자 중 가장 못생긴 남자이다.

그런데 이 교회에 오는 여자 중 엄청 잘 생긴 처녀가 있다. 못난 꼽추가 이 여자를 무척 사랑한다. 그러나 꼽추는 감히 고백을 못한다. 신분도 다르고 자기가 너무나 못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다. 이 아가씨가 꼽추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는 모든 작품을 비극으로 끝낸다. 이 꼽추의 사랑도 이루어지지 않고 비극으로 그친다

짝사랑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상대에게 상처도 주지 않는다. 나도 어려서 짝사랑의 경험이 있는데 물론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기억이 오래 갔다. 아름다운 기억이다, 한국 사람도 왜 그런지 비극을 좋아한다. 영화를 보아도 눈물을 조금 흘려야 좋은 영화로 생각한다. 울고 싶은 사람은 한국영화를 보면 된다.

미워도 다시 한번, 속상해도 다시 한번, 싸우지 말고 서로 이웃이 되자. 사랑을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이웃이 되자.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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