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웨체스터 이야기 ‘호수’

2022-06-24 (금) 노려/전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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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호숫가에 다녀왔다. 단체로 소풍을 간 것이다. 가끔 잔잔한 호수를 무심히 바라보며 한없이 앉아 있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때 호수는 건너편 언덕이 바라 보이고 동그란 연잎사귀 덮힌 물 위로 오리 몇 마리가 눈에 보일 듯 말 듯물결을 일으키며 떠 있는 그런 호수다.

호수라는 말 자체에 이미 속세를 떠난다는 신비한 느낌마저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누가 쉽게 호숫가에서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가 있을까. 해야 할 일에 묻혀 사는 일상에서 시간을 내는 것조차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상 머리 속에 들어있는 그림같은 호수는 다른 자연경관에 비해 드물기도 하다. 더구나 호숫가에서 피크닉을 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며칠 전, 미동부한인문인협회에서 길고 긴 팬데믹 끝에 회원들의 첫 만남을 호숫가에서 갖고 나니 ‘호수’라는 단어가 문인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주는 지를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예이츠의 수많은 시 중에서도 가장 머리에 남는 건 이니스프리 호수다. 시인은 호수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에 오두막을 짓고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섬에다 오두막을 짓지 못했다.

실제로 호숫가에 오두막을 지은 작가는 시인이며 수필가로 알려진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다. 소로는 매사추세츠의 월든(Walden)이라는 호수가에 손수 통나무 집을 짓고 2년 반을 살면서, ‘월든’이라는 책을 저술해냈다.

물과 흙과 나무라는 자연을 아름답게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나대지 않고 고요하기만 한 때문인가. 위대한 문학가인 두 사람 다 권력과 다툼의 속세를 떠난 평화와 소박한 삶을 호수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백조가 되어버린 딸 때문에 흘린 어머니의 눈물로 호수가 채워졌다는 민간설화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되었다.

하지만 문인들이 호숫가에서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웨체스터 카운티를 포함한 뉴욕주에 호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는 어느 하이웨이를 가더라도 한 두 개의 호수를 지나가기 마련이다. 어떤 호수는 한참을 보면서 가기도 하고, 어떤 호수는 연못처럼 작기도 하다. 어떨 땐 양쪽으로 호수를 끼고 꼬불꼬불 드라이브를 한다.

웨체스터 카운티에 몇 개의 호수가 있을까. 74개의 호수가 있다고 구글 답이 나온다. 타코닉 파크웨이를 타고 올라가며 웨체스터 카운티 바로 위의 퍼트남 카운티로 들어서면 그곳에는 호수가 63개 있고 또 그 옆으로 더체스 카운티에는 69개가 있다. 미 대륙의 끄트머리인 뉴욕 주에만 7, 600개의 호수가 있고 커네티컷 주에 3,000개, 뉴저지 주에는 1, 700개가 있다고 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오두막 집에서 산 이유를 시 한 줄을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한다. 돌이 깔린 기슭이며 그 위를 스쳐가는 산들바람 자체가 신과 가까이 하는 생활이었다고 말한다.

오로지 명예와 권력과 돈을 위해 전쟁과 사기와 거짓을 일삼는 세상 속에서 메말라 가는 마음에 미미한 울림이 오는 것 같다.

그렇다고 언제 한 번이라도 호숫가에 앉아 잔잔한 물결을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오려는지, 언제나 가는 길이 바빠서 그냥 지나치던 호수를 이제는 잠시나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려는지. 해야 할 일에 허둥지둥 매여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노려/전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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