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사이드 - 국제전쟁 6.25

2022-06-22 (수)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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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은 6월이 되면 6.25를 생각하고, 6.25 하면 同族相殘(동족상잔)이란 네 글자를 공식처럼 떠올린다. 모두가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과 관련,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북한 인민군 선봉에 만주출신 조선인들로 구성된 조선족 부대가 여러 개 있었다는 것과 이 전쟁이 최초의 미중전쟁이었다는 점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놀랍게도 북한군의 병력 21개 연대 중 반 정도가 조선족 부대였다는 것이다. 개전 3일후인 6월 28일 서울 중앙청을 가장 먼저 점령한 부대가 다름 아닌 조선족들로 이루어진 조선인민군 제4사단 18연대였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당일 새벽 4시, 인민군이 200여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쳐들어 왔는데, 사태는 내전이 아닌 소규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엔 결의에 따른 국제사회 개입으로 상황은 국제전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100만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이는 중국과 북한, 그리고 그들이 앞세운 중국내에서 벌어진 내전의 베테랑급 조선족 전투원들의 참전으로 수많은 미국과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 미중전쟁이었다.

중공군이 18개 사단에 이르는 막대한 병력의 인해전술을 펼치면서 전쟁의 양상은 국제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6.25에 비하면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약한 수준의 국제전이라고나 할까.

당시 중공군의 출현을 과소평가한 맥아더 장군의 실수로 아군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다. 중공군의 전격적인 참전이후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만주지역 폭격을 포함한 강력한 응징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1.4 후퇴 이후, 트루만은 사실상 국제적인 전쟁으로 바뀐 현실을 절감하고 휴전만이 인구대국 중국과의 싸움에서 벗어날 유일한 출구전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951년 4월 경기도 가평에서 유엔군 27여단은 머릿수가 다섯배나 많은 중공군을 맞아 사흘동안 고전을 치렀다는 기록도 있다.

휴전 협정을 보면 이 전쟁이 결코 내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휴전서명식에 대한민국은 빠지고, 유엔군과 중공군 그리고 북한군 3자 대표들이 휴전 조인문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얼마전 중국에서는 6.25전쟁을 미국에 대항에 북조선을 지켰다는 의미의 항미원조전쟁 또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홍보하면서 ‘압록강을 건너’라는 40부작 대하사극을 제작, 중국 공영방송인 CCTV를 통해 황금시간대에 전국에 방송했다고 한다. 미중전쟁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 진행중인 것이다.

6.25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싸웠던 학도병들이 아직 생존하고 있다면 다들 팔순을 훨씬 넘긴 지금, 미국과 중국은 제2의 미중전쟁을 치루고 있다. 특히 코로나사태로 경제와 가정이 망가져버린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중국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


러다보니 같은 동양인인 우리 한인들도 덩달아 무차별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과 자유 대한민국은 엄연히 다른 체제와 민족이라는 점을...

한미동맹은 벌써 100년을 향하고 있고,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 전략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파트너라는 점을 널리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동양인이라고 다 같은 동양인이 아니고 모든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처우받는 것을 당연시한 사실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

지구상에서 피 흘리면서까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을 지켜낸 유일한 동양 민족은 우리 한인들뿐이다. 미국내 한인들은 최소한 동양인 혐오의 대상이 아닌 감사와 상호존중의 대상이 될 충분한 역사적인 자격이 있다. 이 사실을 자녀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자.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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