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생각 - 우리 모두의 ‘선택의 땅’

2022-05-23 (월) 이태상/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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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열된 시대에) 이야기와 문학이 그 언제보다 더 중요하고,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서로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버락 오바마 제44개 미국 대통령이 회고록 ‘약속된 땅(A Promised Land)’과 관련해 일본계 미국 문학 평론가이자 서평가 미치코 가쿠타니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2016년 5월초에 백악관에서 영화와 브로드웨이 쇼에서 제36대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1908-1973)으로 분(扮)한 배우 브라이언 클랜스턴(Bryan Cranston, 1956 - )과 가진 대담에서 이런 말도 했다.

“린든 존슨 대통령 같은 사람이 그랬을지 모를 정도로 이 백악관 자리를 탐내지 않은 나로서 결코 잃지 않은 것은 내가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 난 국민건강보험 법안을 서명한 것이나 유엔에서 연설한 것이 아니고 내 딸들과 보낸 순간을 기억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이 말에 청소년 시절 읽은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1828-1910)의 단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떠올랐다.

모범생으로 법대를 나와 판사가 되고 러시아의 상류사회로 진입, 출세가도를 달리던 40대 이반 일리치가 새로 장만한 저택에 커튼을 달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면서 마지막 순간에 그가 기억하고 위안받는 건 다름 아닌 그의 어린 시절 벗들과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 서리해온 설익은 자두를 입에 물었을 때 그 시고 떫은 맛을 감미롭게 떠올리는 것이었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난 뭘 생각하게 될까. 얼핏 떠오르는 건 비록 내 피 한 방울 섞이진 않았어도 2008년 9월 25일 조산아로 태어나면서부터 내 외손자 일라이자(Elijah)와 같이 보낸 순간순간들일 것 같았다. 천국이 따로 없었음을 너무도 실감하게 되리라.
몇 년 전 ‘갭 이어(gap year)’란 단어가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의 큰 딸 말리아가 하버드대 진학을 1년 미루고 ‘갭 이어’를 갖는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이 ‘갭 이어’란 고교 졸업생이 대학 진학을 늦추고 한 학기 또는 1년간 여행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회경험을 통해 진로를 모색하는 기간을 말한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선 일반화가 된 제도지만 미국에는 2000년대 들어 하버드대, 예일대 등 아이비리그 학교들을 중심으로 도입되어 실시되고 있다.

1978년 여름, 내 세 딸들이 여섯, 여덟, 아홉 살 때 영국을 떠나 우리 가족이 하와이로 이주, 한국과 미국 각지로 6개월 동안 여행하고 애들 음악교육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한 학기 학교 수업을 몽땅 다 빼먹었었는데 학업성적이 뜻밖에도 전보다 뒤지기는커녕 더 좋아져서 놀란 적이 있다.

이 지구별에 태어난 사람이면 얼마 동안 머물게 되든, 우리 모두의 삶이 ‘갭 이어’라 할 수 있지 않으랴. 이 지상의 세상 경험을 쌓으며 각자의 우주적 진로를 탐색해보라고 주어진 기회가 아닌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지상의 ‘갭 이어’를 잘 활용해 그 더욱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우주여정에 오르게 되는 것이리라.

<이태상/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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