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며, 느끼며 - 밥심으로 산다

2022-05-06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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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플이 만든 미국 드라마 ‘파친코(PACHINKO)’시즌1 (코고나다, 저스틴 전 감독)이 끝났다. 지난 3월25일 시작되어 4월29일 8부작 종영이 됨과 동시에 시즌2 제작이 공식발표되었다. 몇 년 전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를 처음 읽고 “참 잘썼다”고 내내 감탄했던 터라 이번 애플 TV 플러스가 출시한 ‘파친코’를 보면서 느낀 점이 많다.

일제 강점기인 20세기초 부산 영도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는 선자의 부모,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선자, 아들 노아와 모자수, 손자 솔로몬 등 가족 4대의 이야기를 191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다룬다.

원작자인 이민진은 7세에 미국 이민 온 코리안 아메리칸, 각본, 감독, 총괄 프로듀서 모두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린시절 한국에서 미국에 왔다. 출연진은 노년의 선자 역으로 윤여정, 선자의 첫사랑 한수 역에 이민호를 비롯 대부분 아시안 배우들이 출연했다.
애플은 이번 드라마 시즌1 제작에 8,000만 달러(1,000억원)를 들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하 조선인의 이야기는 미국 드라마 사상 처음이다. 우리는 그동안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희생된 위안부 증언을 소개하면서 일본의 사과를 끈질기게 요구해 왔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 한 편이 조선의 강제식민지화와 2차대전 전범국 일본, 재일조선인의 설움 등 근현대 한국 역사를 순간에 보여주었다.
한편, 드라마는 소설과 별개의 창작 장르인데 워낙 원작이 좋아 자꾸 비교를 하게된다.

소설에는 없는 장면으로 한수가 아버지와 둘이 살던 시절, 똑똑한 한수는 미국인 홈즈네 아들 앤드류의 수학 과외선생이다. 그들은 한수에게 예일대에 같이 가자고 한다. 아버지도 미국에선 우리같은 사람도 출세할 수 있다면서 부유의 땅 미국으로 가라고 한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온 도시가 폐허화되면서 배를 타러가던 홈즈 부인과 앤드류가 죽고 만다. 미국에의 기회도, 꿈도 사라진다. 한수가 그때 미국에 왔더라면 야쿠자가 안되고 예일대 박사가 되었을까. 주류사회에 한국인의 위상을 높일 뿐 아니라 한인사회의 초석을 세우는데 기여 했을까?

미국 기업 애플은 ‘미국 나라 좋은 나라, 기회가 있는 나라’ 임을 은연 중 부각시켰다. 그러나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래, 그런 기회가 있을 뻔 했지 수긍하게 된다. 그때의 미국은 그랬으니까.

무리수다 싶은 부분도 있다. 선자와 이삭은 오사카행 배를 탔다. 무대에서 아리아를 부르던 가수가 갑자기 우리 민요를 한바탕 부르더니 칼로 목을 그어 자살한다. 가수 윤심덕을 묘사했다고 한다.

윤심덕은 1925년 한국최초의 대중가요 ‘사의 찬미’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관부연락선에서 유부남 애인 김우진과 바다로 뛰어들어 동반자살했다.


재일한인들은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로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파친코 사업에 뛰어드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에 훅 들어온 것은 선자의 엄마 양진이 곡물상에게 쌀을 팔라고 하소연하는 장면이다.

딸 사위의 일본행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조선땅에서 나는 쌀로 밥 한 끼 지어먹이고 싶다. ”고 한다. 소설에 그런 장면이 있었던가 싶어서 책을 펼쳐 확인했다. 있었다.
조선의 쌀은 전북 군산 미곡 창고에 쌓여 있다가 일본이나 한양의 일본인에게 실려 갔다. 조선인에게는 쌀을 팔지 않았다.

양진이 경건하게 쌀을 씻어 가마솥에 밥을 짓는 장면을 보아서 그런지 요즘, 갓 지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흰쌀밥에 꽂혀있다. 온 집안에 퍼지는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좋다.

최근,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푸드뱅크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저소득층과 실직자들이 도저히 세끼를 먹을 수 없어서 무료식품을 신청하여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밥은 먹고 살아.”, “밥심으로 산다.” 이 말이 실감난다. 미국에서 이런 말이 귀에 들어올지 과거에는 상상이나 했던가.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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