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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심곡암 원경 스님을 아시나요

2022-03-17 (목)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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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심곡암 원경 스님을 아시나요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하늘에서 보배로운 비가 가득 내려도 각자 가진 그릇만큼만 받을 수 있나니). 왠지 나는 이 구절을 지날 때면 몰래 한 잘못을 들킨 것처럼 좀 움찔하곤 한다. 내가 법성게를 처음 배운 게 법륜 스님의 동영상 강의를 통해서였는데 워낙 날카롭게 내 폐부가 찔린 때문인지, 그 뒤로 찬찬히 돌아본 ‘내 그릇’이 참 한심했던 걸 자각했기 때문인지, 둘 다 때문인지. 법륜 스님 말씀대로 내 그릇이 너무 작았거나 크기를 따질 계제도 아니게 아예 거꾸로 들고 있었거나.

박약한 내 불연을 보니 나는 분명 그릇을 거꾸로 들었다. 누구누구는 우연히 접한 귀한 말씀 한 조각에, 해질녘에 고요히 어디론가 걸어가는 스님의 실루엣에, 스님의 따스한 미소에, 고요한 절간 하룻밤 평화에 발심을 하고 수행을 하고 마침내 이제는 자신의 행불 문제를 거의 해결하고 ‘함께 행복한 세상’을 가꾸려 즐거이 감사히 분주한데, 나는 줄달음에 달려갈 거리에 만덕산 백련사가 있고 반나절 잡고 거꾸로 산을 타거나 읍으로 가 버스를 타고가면 그럭저럭 한 30분이면 일주문에 닿는 두륜산 대흥사가 있는 마을에서 낳고 자랐지만 은혜로운 명찰 사이에 사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몰랐고 부처님 가르침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도 몰랐고, 탁발중인 스님들 뒷전에 감자바위나 먹이고 구업이나 지었으니, 결과는? 소위 육학년이 되고서도 함께 행복한 세상은 꿈도 못꾸고 내 한몸 건사에 급급한 삶의 연속이다.

대강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최근 또 참회를 해야 했다. 요즘은 의식적으로 비탄조 노래를 멀리하지만 예전에 배호 노래 참 많이 듣고 불렀다. 똑똑해서 좀 무섭기도 한 유튜브 알고리즘은 온갖 곳을 다 뒤져 별별 사람들이 부르는 배호 노래를 부지런히 내게 배달해줬다. 그중에 서울 북한산 심곡암 원경 스님의 ‘안녕’ 열창도 있었다.


원경 스님? 특이한 스님이군 했다. 왠 딴따라 스님? 하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부처님 가르침에 무릎을 꿇기 전이었다면 아마 그런 구업을 지었을 것이다.

북한산 심곡암? 90년대 초중반 4,5년간 그 근처에 살았지만 심곡암이 거기 있다는 걸 몰랐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새천년 초기에 원경 스님이 LA 고려사 주지를 지냈다는데 대강 비슷하거나 조금 앞선 시기에 나도 LA에 살았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뒤를 밟는 것 같은 동선에도 불구하고 스님과의 인연은 맺어지지 않았다.

한참 지난 몇년 전에야 원경 스님이 ‘함께 행복한 세상’을 위해 정말 깨소금 역할을 해왔음을 알고 나는 다시 내가 든 그릇을 생각했다. 또 몰랐구나. 다시 나는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 있었구나.

규모가 별로 크지 않으니 굳이 창건이랄 것도 없고 그나마 한 100년정도밖에 안된 ‘이름없던 심곡암’이 천년고찰 천년 천몇백년 하는 고찰들이 미처 못하거나 안하거나 소홀히하는 허기진 이웃에 따스한 밥 한끼(원각사 노인 무료급식) 보시를 10년 가까이 해오고 있고, 봄이면 산꽃축제 가을이면 단풍축제 이름으로 20년 넘게 산사음악회를 열어 지친 도시인들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대도시 산중사찰이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LA 고려사 시절 말고는 90년대 후반부터20년 넘도록 줄곧 심곡암을 지켜온 원경 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을 겸하는 원경 스님이 지난 연말 잔잔한 감동이 일렁이는 책 한 권을 냈다. 도서출판 담앤북스가 펴낸 <밥 한술 온기 한술>이다. “당신의 춥고 허기진 속을 채워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따듯할 때 어서 드세요’ ‘식구라는 말’ ‘그대 꽃처럼’ ‘일상이 기적이다’ ‘바삐 산다는 것은’ ‘심곡암을 깨우는 꿩 소리’ ‘꽃 피고 새 우는 봄’ ‘바위틈 들꽃들에게서 배운다’ ‘공양주 정토심 보살을 보내며’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다’ 등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듬뿍 담고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큰 폭풍 같은 시련이 당장은 견디기 힘들 만큼의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이겨 내고 나면 그 사람의 삶은 더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마음에도 굳은살이 박여 웬만한 생채기에는 끄덕하지 않는 힘이 길러진다. 살면서 태풍 같은 고난을 겪지 않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행운을 기대하기보다는 맞닥뜨릴 힘을 키우는 편이 좋다." 태풍전야라는 제목을 단 글에서 원경 스님이 들려준 지혜는 이랬다. 태풍아 오지 마라 태풍아 멈추어다오 부릴없는 기도보다 태풍에 맞설 힘을 키우라는 말씀이다. 수십편의 다른 글에도 대개 이런 지혜들이 빛난나. 행여 서울에 가거든, 큰 절만 말고 북한산 심곡암에 들러 원경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말씀을 들어보면 어떠리.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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