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손경락의 법률 칼럼 - 공소시효의 명암

2021-08-18 (수) 손경락/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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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경기도 화성시(당시는 군이었음) 일대에서 부녀자 10명이 강간,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살인의 추억’(봉준호 감독)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른바 화성연쇄살인사건 이야기다. 5년여 동안 같은 지역에서 잔인하게 반복된 범행으로 인근 주민뿐 아니라 전 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이 사건에 연인원 205만여 명의 경찰력이 동원되어 지문대조 4만, 그중 2만 명을 수사했지만 수 십 년간 진범이 명쾌하게 잡히지 않아 강력범죄 사상 최악의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는 듯했다.

오랜 답보상태에 머물던 사건은 DNA 해독기술의 발달과 함께 이를 기반으로 한 신원정보자료 등이 축적됨으로써 2019년 드디어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당시 피해자의 증거물에서 채취했던 DNA가, 자신의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죄로 구속돼 무기수로 25년째 복역중인 이춘재(57)의 것과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범죄혐의를 부인하던 이춘재는 프로파일러 등을 동원한 경찰의 끈질긴 대면조사 끝에 14건의 살인과 9건의 강간사건 등 그간 밝혀지지 않은 사건까지 모두 자신이 저질렀음을 자백했다.


하지만 그의 자백 내용을 경찰이 사실 확인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기소는 불가능하다. 범행 당시 법으로는 살인죄의 경우 공소시효가 15년이라 지난 2001~2006년 사이에 모든 사건에 대한 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강력범죄자를 엄벌하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2007년 15년에서 25년으로 공소시효가 한 차례 연장되었고, 2015년에는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완전히 폐지됐지만 형벌불소급의 대원칙에 따라 이춘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처럼 시효란 형사사건에서의 범죄 행위나, 민사사건에서 손해가 발생하여 법원에 기소 또는 소송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기간 동안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자동 소멸되는 제도를 말한다.

보통 사건 발생일로부터 유효기간을 계산하지만 피해자가 미성년으로 신고를 하지 못하는 성폭력 사건에선 피해자가 성년이 된 날부터, 또는 피해가 이미 발생했지만 피해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면 발견한 날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프로소송군’(sycophant)들의 소송 남발을 막기 위해 처음 도입된 것으로 알려진 공소시효는 현대 법리에 의하면, 사건에 대한 당사자들의 기억이 부정확해짐에 따라 재판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고, 오랜 시간 증거물 보존에 따른 어려움과 공적 비용이 발생하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생활 안정도 보장해주어야 하고, 시간의 경과로 인한 사회적 관심 희석 등을 그 필요성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최근의 세계적 추세는 증거물 보관 기술의 발달과 아울러 DNA검사나 CC-TV같은 각종 과학적 뒷받침도 가능해져 한국과 마찬가지로 강간이나 살인 등 강력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분위기이다.

그 예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경우, 원로 유명 코미디언 빌 코스비(Bill Cosby)가 반세기에 걸쳐 60여 명의 여성을 성추행 또는 성폭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공소시효 만료로 기소를 피해가자 이 사건을 계기로 2016년 강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했다.

그 외의 공소시효는 주의 법에 따라, 또는 범죄행위의 경중에 따라 유효기간이 각각 다르다.
또 똑같은 행위를 두고도 형사사건으로 접근하는지 아니면 민사사건으로 접근하는지에 따라 시효가 달리 적용된다.

예컨대, A가 뉴욕주에서 중범죄에 해당하는 폭행죄를 저질렀다면 형사사건의 공소시효는 5년이지만, 폭행죄로 인한 치료비 등을 A에게 청구할 수 있는 민사사건의 소멸시효는 1년밖에 되지 않는다. “정의에는 유효기간이 없다”는 법언이 있긴 하지만 일상 대부분의 사건에선 정의에도 유효기간이 있는 셈이다.

<손경락/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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