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생각 - 내가 겪은 6.25 전쟁

2021-06-24 (목) 서병선/뉴욕예술가곡연구회 회장
크게 작게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250 대의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예고 없는 남침을 개시했다.

우리 집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 농가마을이었다. 그당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초가3간 집에서 살았다. 3아들과 부모님 5식구가 마루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멀리서 따당 따당 어린아이들 딱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온 식구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소리이지 ? “ 어느 덧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마쯤 후“ 소대 쏴! “하는 소대장의 명령소리가 떨어지자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덧 군인들이 우리 집 바로 뒷동산에까지 와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급해진 식구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건너방 아궁이 밑으로 피신하기위해 황급히 움직였다. 온식구들을 다 피신시키고 마지막으로 움직이는 아버지를 향해 “저거 뭐야 !” 하는 소리와 함께 몇 발의 총성이 울렸으나 총알이 빗나가 아버지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얼마 후 이웃집을 방문하니 울음소리가 진동했다. 이불을 쓰고 피신하던 사람이 총탄에 맞고 목숨을 잃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지혜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구들장이 두꺼운 돌로 만들어져 총탄이 구들장을 뚫을 수 없었기에 우리 모두가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치열한 전쟁은 계속 되었고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여기저기서 폭격 당해 죽어가는 비극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얼마 후 외동아들인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고모님이 비행기 폭격으로 딸과 함께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는 이 무서운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겪은 지 71년이 되어도 한 혈육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아직도 적대적 대치를 하고 있는 수치스러운 국민임을 부인할 수 없다.
독일도 한때는 동과 서로 갈라진 민족분단의 비극에 처한 때가 있었다.

독일은 17세기에 Minnesinger란 가곡 부르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을 순회시키므로 온 국민이 가곡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가곡의 자질인 소박, 정직, 사랑, 지성 등… 문화적 자질이 국민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오고 있기 때문에 분단 속에서도 서로 싸우지 않고 교류가 지속돼었고 평화적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노래와 음악을 듣고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고 사랑의 마음을 키워갈 때 내 혈육을 살생시키는 동족상잔의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300만 명의 주민을 굶겨 죽여가며 미사일을 만들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잔악한 독재자는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서병선/뉴욕예술가곡연구회 회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