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손경락의 법률 칼럼-‘척 보면 압니다!’법

2021-05-19 (수) 손경락/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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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법 중에는 속칭 ‘척 보면 압니다!’라는 희한한 법이 있다. 민사상의 불법행위법(tort law)에 속한 법리 중 하나인 ‘레스 입사 로퀴투르’(res ipsa loquitur, 과실추정의 원칙)를 일컫는 것인데, 법률용어로 자리 잡은 이 라틴어가 ‘척 보면 압니다!’ 정도의 의미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미국법들이 대부분 사실의 인과관계를 철저히 따져 합리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면 이 법은 일종의 이단아인 셈이다.

보통 가해자의 과실로 발생한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주의 의무를 지키지 않아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을 피해자가 입증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무언가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은 분명하지만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증명하기가 까다로운 경우가 참 많다. 이때 바로 이 ‘척 보면 압니다!’법이 인용되는 것이다.

이 법리는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63년, 영국의 항구도시 리버풀에서 유래했다. 무더운 여름철 어느 날 밀가루 상점의 종업원들이 2층 창고에서 상점 앞에 세워 둔 수레에 밀가루 하역작업을 하고 있었다.

무거운 밀가루 통을 밧줄로 묶어 계단 대신 창문을 통해 내리다 그만, 정확하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때마침 가게 앞을 지나가던 행인 조셉 번(Joseph Byrne)이 이 밀가루 통에 어깨를 맞고 쓰러지면서 문제가 되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 절름발이 신세가 된 조셉은 가게 주인 아벨 보들(Abel Boadle)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700파운드(현재 가치로 한화 약 1억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네 유지였던 아벨은 재판이 벌어지자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을 동원해, 종업원들이 밀가루 통을 떨어뜨리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심지어 가게의 손님이 가해자일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은 책임질 수 없다고 항변했다. 재판부는 원고인 조셉이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셉의 청구를 기각했다.

사건은 상위 법원으로 올라가 부장판사 배런 폴락(Baron Pollack)이 항소심을 맡게 됐다. 배런은, 상식적으로 누군가의 과실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한 상황에서 원고 조셉은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고, 사고가 발생한 장소와 물건이 완전히 피고 아벨의 통제하에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증거 여부를 떠나 아벨의 과실이 입증된다고 판단하고 1심 재판부의 판결을 뒤집었다. 쉽게 말해 한국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간단명료한 이치의 판결은, 이후 막심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피고의 과실 입증이 어려운 사고들 - 예컨대 전신마취 도중 생긴 의료사고, 각종 형태의 낙상사고, 하늘에서 떨어진 벽돌이나 창문 등의 물건에 맞아 생긴 상해 사고와 같은 불법행위 사건들에 적용되어 많은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레스 입사 로퀴투르’ 원칙이 적용된다고 해서 모든 가해자에게 자동적으로 손해배상 책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즉 엘리베이터 낙상사고에서 피고 건물주가 사고의 원인은 자신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부품 결함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비껴가는 식이다.

또 피고의 과실을 입증하려면 전문가의 증언이 필요할 경우가 있는데 이때도 적용이 애매하다. 그 예로, 환자가 마취주사를 맞다 신경을 다쳐 의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텍사스주 항소법원은 ‘배심원들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경험이나 상식만으로 의사가 부주의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이런 경우 ‘레스 입사 로퀴투르’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예외 없는 법은 없다’는 서양 속담대로 이런 경우는 척 봐도 아는 게 아니라 척 보아서는 모르는 예외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손경락/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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