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반드시 침묵과 함께 있어야 한다. 침묵의 투명한 유동적인 성질이 말 자체를 투명하고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다. 말은 침묵 위에 떠 있는 밝은 구름, 침묵이라는 호수 위의 밝은 구름과 같다.
침묵은 말에게는 자연이며 휴식이며 황야이다. 말은 침묵에게서 활기를 얻고 말 자신으로 인해서 생긴 황폐를 침묵으로 정화시킨다. 침묵 속에서 말은 숨을 죽이고 자신을 다시금 원초성으로 가득 채운다.
똑같은 말이라도, 침묵에서 나오게 되면 언제나 다시 새로운 것으로 태어난다. 그 때문에 진리는 늘 똑같은 말로 표현되어도 경직되지 않는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중에서)
침묵은 도피행위나 폐쇄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시고 말씀하시도록 나를 개방하고 비우는 능동태다. 내가 잠잠하므로 하나님이 나를 움직이도록 내어 맡기는 능동적인 고요함이다. 침묵은 하늘로 솟아오르는 새가 잠깐 웅크리듯이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웅크리는 시간이다.
베토벤 전기(傳記)를 쓴 로맹 롤랑(Romain Rollaland)은 제9교향곡에 등장하는 침묵기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환희의 테마’가 나타나려는 순간에 오케스트라는 갑자기 뚝 멎는다. 별 안간 침묵이 내린다. 침묵은 환희의 노래의 등장에 신비롭고 거룩한 성격을 부여한다. 진실로 이 테마는 하나의 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순간 ‘환희의 송가’는 초자연적 침묵에 둘러싸여 하늘에서 울려 퍼지며 내려온다. 뜨거운 숨결로 환희는 고뇌를 어루만져 준다. 그리고 다시금 솟아오르는 기쁨이 마음속에 스며든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신뢰하기 위해 내가 멈추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일을 보기위해 잠잠 하는 것이다. 소란스럽게 떠드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고 기도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다.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신뢰하는 자는 떠들지 않는다. 침묵하며 조용히 기다린다. 살아계심의 증거를 보여 주실 그때 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다.
블레셋 진영 시글락에서 위기를 만난 다윗의 처신을 보라. 첫째, 다윗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자신이 책임졌다. 둘째, 다윗은 논쟁하지 않았다. 침묵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셋째, 다윗은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났다. 아말렉을 추격하여 승리했다. 당신이 리더라면 다윗의 침묵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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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목사·AG 뉴욕 신학대학(원)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