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정든 새와 이별을

2021-04-15 (목) 방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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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불청객인 코로나19로 암담했던 작년 봄, 나를 찾아왔던 귀빈 얘기다. 드라이브 웨이 옆 골병꽃나무곁가지들이 둥글게 아치를 이룬 사이로 새가 자꾸 숨박질한다.

무심히 여기던 중, 아치 속에 웬 낙엽뭉치 같은 게 달려서 치우려고 보니, 새둥지다. 깊숙한 나무속도, 높지도, 않은 거의 가지 끝에. 머리가 약지 않으면, 지관 새에게라도 물어봐야지, 어쩌자고 시야에 노출되는 허술한데다 터를 잡았을까!

둥지 아래로 남편과 나, 또 차가 수시로 들락거리니. 뒤늦게 실수를 인정, 다른 곳에다 재건축하겠거니 했다. 그런데 남편이 발 돋음 해보니 둥지엔 벌써 파란색 알이 두 개 있단다. 이사하기엔 적기를 놓친 상황종료다.


뉴욕엔 제비는 없지만 새들이 많고 종류도 참 다양하다. 해서 친구들 집에는 새들이 해마다 깃든단다. 헌데 우리 집만 새들이 외면, 왕따 당한 듯 섭섭했던 차라 행운의 징조로 여겨졌다.

하필 열악한 장소에 집을 지어 걱정이지만. 그 귀빈은 머리와 꽁지는 까맣고 날개와 등은 진회색에 가슴과 배만 갈 황색인, 참새의 배는 됨직한 크기다. 이름은 모르나, 늘 근처의 전깃줄이나 나무에 앉아 새된 소리로 “삐익!” 우는 우리 집 단골 새다.

인제는 그저 무사히 행운의 알이 부화되기만 기대할 밖에 없다. 우선 내차의 안테나를 뗐다. 행여 가지나 둥지를 건드려 알이 깨질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키 위해서다.
남편과 나는 아치를 지날 때마다 알을 품은 어미 새가 스트레스 안 받게끔 조심조심했다. 둥지가 작아 어미 새의 엉덩이와 꼬리는 밖으로 다 나와 있다. 제 몸태를 겨냥해 맨션으로 짓지 않고 왜 옹색하게 옥탑방으로 지었는지 안타깝다.

드디어 아기 새가 탄생했는데 한 마리다. 새가 꼼지락대자 어미 새가 먹이원정을 나가곤 했다. 그 틈을 이용, 잘 크나하고 슬쩍 둥지를 곁눈질하면, 어김없이 “휘익!”소리가 난다. 둘러보면 근처 전선에 앉아서 매서운 눈으로 내게 경고를 보낸다.

얼마 후 몸집이 야구공만 해진 새끼가 둥지 가에 나와 앉았다. 누런 털 뭉치마냥 참 볼품없다. 어미를 기다리는지 돌부처인양 꼼짝 않고 웅크리고만 있다.

어미는 주변에서 보초만 설 뿐 먹이를 공수하는 낌새가 없다. 새끼가 얼마나 배고플까 애처롭다. 독립할 때니 먹이조달도 스스로 해결하라고 종용하는 건가? 밤이 돼도 어미는 집에 안 들어 온 채 종적이 묘연하다. 비좁아 둘이 같이 있을 수 없으면 옆 가지에서라도 잘 법한데. 나로선 이해불능이다.

그 다음날도 새끼만 홀로 그 모습그대로고 어미는 얼씬도 안했다. 그렇게 만 이틀이 지나자 새끼가 사라졌다. 드디어 용감하게 비상을 시도했나보다. 근처에서 미숙한 나래 짓을 훈련 중인가 살펴봐도 그림자조차 없다.


밤엔 들어와 자려니 했는데 밤새 빈 둥지다. 우리에게 완전 이별을 고한 거였다. 새가 날을 적엔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더니, 한 번 떠난 집도 절대 다시 쳐다보지 않는 거였다. 어쩜 그리 맺고 끊음이 칼날인지 참 서운하다.

새들은 손수 새로 지은 집에서만 알을 낳고 키우는 습성이 있단다. 혹여 내년에 ‘박씨’라도 물고 옛집을 찾는 일은 기필코 없다는 얘기다. 둥지를 철거하면서, 잔 나뭇가지, 짚, 플라스틱조각, 털실 등 자재의 다채로움과, 탄탄하고 세밀한 건축 솜씨에 감탄했다.

그렇게나 공들여 지은 집이건만, 떠날 때가 되니 어미도 새끼도 미련 없이 버리고 훨훨 떠났다. 절대 지난 일에 애착하지 않고 미래도 두려워 않는 증거다. 늘 과거에 연연, 욕심과 미래의 걱정으로 허우적대는 나의 삶이다. 작은 새들의 삶이 훨씬 더 지혜롭다. 그래서 많이 부끄럽다.

새끼 새의 행방은 완전 오리무중이다. 어느 날 뒷마당에 날개 짓이 서툰 새가 우리 새인가 막연히 추측만 할 뿐.

<방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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