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생각-겨울 폭풍이 피워낸 미담

2021-02-10 (수) 방인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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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쁜 함박눈도 심술궂은 바람에 휘돌리면 겁나게 변한다. 예보대로 겨울폭풍이 온종일 위세를 떨쳐, 완전 비상사태선포다. 앞, 뒷문 앞에도 무섭게 눈이 쌓여 나는 이유 없이 자연히 ‘자가 격리’상태다. 펑펑 쏟아지는 눈보라를 헤치며 우선 ‘감금 해제작업’부터 했다.

눈이 비를 머금어 천근만근 젖은 솜뭉치라 진땀이 솟았다. 힘들게 드라이브 웨이에 낸 쪽 길마저 강풍과 폭설의 합작으로 금세 사라져버렸다. 할 수없이, 오후에 재정비해야만 했다.

눈이 멈춘 다음날은 하얀 신세계였다. 천지가 하얗게 구릉진 하얀 사막 일뿐, 아니 고양이와 토끼가 달나라인 줄 알았는지 콕콕 새겨 놓은 발자국들이 있다. 어제 기껏 공들여 낸 길은 흔적조차 없고 더 높은 눈더미로 문은 또 무용지물이 됐다.


거기다 제설차는 도로변에 산처럼 거대하게 눈으로 담을 쌓아 눈 보루를 구축해 놓았다. 도시 치울 엄두가 안나 아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 후 밖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옆집 여자가 고교생 아들하고 우리 드라이브 웨이의 눈을 뗘내고 있는 게 아닌가. 입구의 ‘설벽(雪壁)보루’도 어느새 뚫려있다.

급히 눈삽을 들고 나가서 말리니까, 오히려 나보고 들어가라며 “go1 go!” 한다. 내가 “아들이 올 거다. 차 쓸 일도 없다. 날이 풀리면 녹게 둬도 된다.” 해도 막무가내다. 자기가 다해줄 걸 약속하니 걱정 말고 들어가란다. 양심상 말도 안 돼 합류했다,

기운이 딸려 젊은 그들의 삽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미안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니 그만두라니까, 도리어 내 얼굴을 보며 얼른 들어가 뜨거운 물이나 마시고 쉬란다. 완전 주객전도다.

서로 이웃한지 25년! 그저 보면 손이나 흔들고 인사나 나누는 정도로 특별한 친분관계도 없다. 일 년에 몇 번, 두 집 마당을 경계 지은 쥐똥나무 울타리를 남편이 전지하면, 나는 그 집 마당을 싹 치워주곤 했던 것뿐이다.

보통은 남자들이 제설기(Snow Thrower)로 눈을 치울 땐, 옆집보도까지 서로 해주곤 한다. 허나 여자가 눈삽으로 남의 드라이브 웨이를 치워주는 건 결코 흔치 않다. 아마도 골목에선 우리만 고령인데다, 남편이 한국에 체류 중인 걸 알고 그러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즐거운 듯이 푹푹 삽질 하는 폼이 화통하고 멋지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나보고 연신 들어가라고 권유하며 웃는다. 진심과 염려가 담긴 새파란 눈이 따스하고 아름답다.


나중에 앞문 쪽을 치우려 나가보니, 문 앞과 계단만 남기고 우체부가 다닐 길과 보도까지 싹 치워져있다. 언제 나를 보았는지 “왜 또 나왔냐!”며 내가 들어갈 때까지 감시하듯 지켜본다. 너무 고마워 찡하다.

다음날, 어제 닦아놓은 길에 얇은 ‘눈 이불’이 덮였다. 눈삽으로 슬슬 밀어도 되는 착한 눈이다. 과대한 친절을 어찌 갚나 부담되던 차라 새벽에 나갔다. 옆집의 보도와 드라이브 웨이를 싹싹 밀었다. 뭐든 받는 것 보다 주는 게 행복하다더니, 남을 위해 뭔가 살금살금 하다 보니 마냥 유쾌하다.

나로선 약간의 ‘Give and Take’ 가 된 셈인가싶어 좀 마음이 가볍다. 물론 어제와 오늘의 ‘노동강도’를 비유하자면 독수리와 참새 격이지만…

<방인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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