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75주년 특별기획 - 장경호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 논문서 발표
▶ 2차대전 당시 한인2세 절반이상 미군으로 참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한인 2세 헨리 윤(앞줄 오른쪽부터)과 김인이 1942년 4월 한인사회가 결성한 미군 예비군 성격의 한인국방경위대 맹호군 사열에 참가한 모습. [사진=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1942년 1월부터 본격화…대다수가 미주독립운동가 자녀들
LA출신 116명·샌프란시스코 24명…뉴욕은 2명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 입대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나섰던 미주지역 한인 2세가 260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장경호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미군에 종군한 북미 한인 2세 연구’ 논문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으로 참전해 일본 등과 싸운 미주 한인 2세는 최소 259명으로 집계됐다.
기존에 추산됐던 한인 2세 참전용사 수는 약 195명이었으나, 이 논문은 당시 미주한인언론사인 ‘신한민보’의 청년 용사록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에서 제공하는 한인 참전용사 명단을 일일이 대조·분석해 최소 259명의 한인 2세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참전했음을 새롭게 밝혀냈다.
이 같은 숫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시민권이 있는 한인 2세 가운데 참전이 가능한 연령대는 거의 절반 이상이 참전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1940년 센서스에 따르면 미국 내 한인인구는 1,711명으로 이 중 962명이 시민권자이다.
당시 한인 1세는 법적 귀화가 금지됐기 때문에 한인 시민권자 대다수는 2세로 볼 수 있으며, 입대가 가능한 18세 이상 숫자를 감안하면 당시 한인 2세 절반 이상이 참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한민보 보도에 따르면 2세들의 참전은 미국과 일본 간의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안필립·안필선 등 8명이 입대하면서 시작됐고, 이듬해인 1942년 1월부터 본격화됐다.
당시 한인 2세들은 그들이 태어난 미국을 위한 것을 넘어 모국인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웠던 것으로 분석된다. 신한민보 1942년 4월2일자 보도에 따르면 홍성락은 “일제가 조선인 속박을 하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늘 원수 갚기를 바라다가 바로 자원 종군했다”고 말했다.
더욱이 대다수 참전 2세들의 부모들은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었고,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들의 동반 참전도 상당수에 달했다.
논문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해 미군 입대를 독려했던 신달윤 새크라멘토지방회 부회장 등 독립운동을 이끌고 지원했던 한인 1세 수십명의 자녀들이 참전했다. 미주한인독립운동사에 기여한 인물들의 자녀들 상당수가 부모의 뜻을 이은 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한인 2세 참전용사의 절반 가량인 116명은 LA 출신이고, 이어 샌프란시스코 24명 등 캘리포니아 출신이 대다수를 이뤘다. 뉴욕 출신은 미 육군에 입대한 최창수와 하와이 태생이지만 전쟁 당시 뉴욕에 체류하던 앤드류 안 등 2명이 있다.
한인 2세들의 전과도 뛰어났다.
훈장을 받은 이들도 적지 않았으며 특히 전쟁 막바지인 1945년 4월 1일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한인 참전용사 67명이 참여해 서로를 격려하며 ‘부모의 교훈에 의지해 모국의 원수와 싸우자”는 목표로 싸웠다고 신한민보는 전했다. 이 외에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희생된 한인 전사·실종자는 최소 8명이다.
당시 한인 2세 참전용사들의 활약상은 독립을 염원하던 한인사회를 매우 고무시켰다.
한인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건축해 영원히 공로를 기억하자는 취지로 1943년 3월 ‘한족출정군인 친족회’라는 조직이 출범했으나 이후 활동 내역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졌다.
전문가들은 한인 2세 참전용사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모국의 독립이 이뤄진지 75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그들의 존재와 헌신은 제대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잊혀진 영웅들의 발자취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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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