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인이민 개척자들

2020-01-10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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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의 한인이민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시작됐다. 101명의 한인들을 실은 최초의 이민선은 1902년 12월22일 인천을 출발해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905년 일본의 제지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국가기록원 ‘재외한인의 역사’ 자료 중에서)

당시 농장측에서는 부족한 노동력을 해결하고자 인천내리교회 선교사를 통해 하와이 이민을 권유, 첫 승선자 가운데 내리교회 신자가 50여명이었다. 이들은 하루 10~12시간씩 일하는 악조건 속에서 한인교회를 세웠고 모국에서 데려온 사진신부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위해 학교를 세웠다. 이들 대부분은 하루빨리 돈을 벌어서 금의환향하려는 마음이었다. 막상 농장 계약이 끝난 이들은 돌아가려니 한일합방으로 돌아갈 조국이 없어졌기도 하고 좀 더 돈을 벌고자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오는 13일 한인 이민 117주년을 맞으면서 초기 이민자들의 눈물과 땀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들이 조국을 떠나온 당시 1903년 서울근교 사진을 보면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초가집이 즐비한 좁고 남루한 거리를 흰 두루마기 차림 노인, 댕기머리 총각, 옹기장수나 닭장수, 나뭇꾼, 머리에 짐을 이고 가는 여인들을 볼 수 있다.


초기 이민자들은 더 이상 배를 곯지 않기 위해 조국을 떠나 왔던 것이다. 초기 한인이민에 또 하나 중요한 부류는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유학으로 미국에 온 541명 정도의 학생들이다. 이들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사회 지도자로 활동했다.

1903년 미국은 미국 태생이 아닌 세계각국의 이민자들로 북적이고 세계정세는 전쟁과 내전과 경기의 오르내림이 심했다. 이 해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고 지배하고자 했으며 그 해 6월16일 포드 자동차회사 출범, 10월1일 제1회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가 개막했으며 12월17일 라이트형제가 만든 인류최초의 비행기가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1965년 개정이민법이 통과된 이후 한인이민자들이 몰려들었고 지금은 미주한인 숫자 250만명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한국인의 공식이민 시작을 1903년부터라고 하지만 그 이전에도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이 있었다.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한 서재필(1864~1951)은 1885년 미국에 망명, 1890년 6월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인 시민권을 받았다. 그러니 1885년이 이민 시초인 셈이다.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서재필 박사는 그해 4월 필라에서 이승만, 윤병구, 유일환, 조병옥 등과 한인연합회의를 열고 한국이 일본의 피해자임을 알렸다.

개화파 변수(1861~1891)는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일본 망명, 1886년 미국 유학, 1890년 한인 최초의 미국 공무원인 농무성에서 일하다가 1891년 열차사고로 죽었다.

안창호(1878~1938)는 1902년 유학생 신분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왔고 남가주 한인사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1919년 3.1운동이후 세워진 상해 임시정부가 그를 내무부 총장으로 선출하자 미주 및 멕시코 동포들이 모은 성금을 갖고 가서 임시정부 통합의 기틀을 다졌다. 이렇게 초기 한인이민자들이 지금의 대한민국 반석을 만드는데 공헌했으니 우리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

이 땅에서 잘 살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미주한인이민사를 알아야 하고 올해 대선에서 누가 한인사회에 이로울 자인지를 잘 판단하여 귀중한 한 표를 던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력 신장이고 한인사회의 미래이다. 1세, 2세, 3세 모두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지가 보인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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