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겨울, 그 강을 건너며

2019-12-27 (금)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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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겨울 하늘은 오래전에 보았던 알라스카의 방하처럼 눈부셨으나 푸르렀고, 푸르렀으나 시리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움츠려든 어깨 위에 푸르고 시린 하늘을 짊어진 채 이 겨울을 견뎌야 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였는지, 아니면 추위 탓인지, 온 몸으로 한기를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쩌면 바람도 추위를 피해 내 옷깃 사이로 숨어 들어 몸을 녹이고 가는 걸 거라고, 잠시 생각 했었다.

​가을이 떠난 자리는 비워진 그대로 멈추어 풍경이 되었다. 얼어 붙은 땅과 하늘 사이로 한 무리의 새들이 안쓰러운 날개짓을 하며 머물다 사라졌다. 문득 겨울이 추운 것이 아니라 겨울로 가는 길이 추운거라고 생각했다. 홀로 떠나는 길이고, 내려 놓아야만 건널 수 있는 강이 앞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절망했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득 광장에 홀로 남겨졌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방으로 길이 열려 있었는데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어둠은 너무 쉽게 내가 걸어 온 길을 지우며 따라왔고, 그래서 열려 있는 길 어느 쪽도 길의 끝은 늘 어둡고 막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아서 무섭고, 다시 안도하고 했던 기억 너머에 늘 겨울 나무가 서 있었다. 그래서 겨울 나무를 본다는 것은 팔십 여 년 짧지 않은 세월을 사시다 간 어머니의 묘비를 읽어 내려가는 것 처럼 마음이 아팠다.


​집 뒤로 열린 산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숲으로 가는 길 위로 겨울 해가 머물다 스러진다. 차가운 햇살을 피해 돌아 앉은 갈대는 멀리서 하얗게 빛났고, 나무는 검은 골격을 그대로 드러내며 지나가는 작은 바람에도 서걱거렸다. 대부분의 아픔은 잊혀지고 엷어지겠지만 내성이 생기는 데 필요한 시간의 길이와 세월의 폭이 조금은 다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숲도 사람도 견뎌내야 하는 시간만 있을 뿐이었다.

​나즈막한 능선을 따라 섬처럼 떠 있던 작은 집들이 사실은 산 아래에 모여 서로 의지하고 있었음을 그제서야 알았다. 높고 낮음도, 있음과 없음의 차이도 없어 보였다. 마치 절대자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모두가 그저 한낱 피조물이 되듯, 겨울은 세상의 모든 관념을 맨 몸으로 읽어내고 있었다. ​

​돌이켜 보면 겨울로 건너가는 강 앞에서는 늘 마음이 무겁고 암울했다. 봄의 수많은 유혹을 견뎌 냈고,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보면서도 씩씩하게 여름을 건넜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서야 잠시 빛나는 하늘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겨울, 그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것들을 모두 내려 놓아야 했다. 겨울은 과거와 끊는 일이며, 그 익숙함을 버리고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겨울을 마주하기가 두렵고, 그렇게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무게에 눌려 하루 해를 떠 안기도 버거웠던 순간이 있었다. 해질 녘 다시 오겠다는 당신의 말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으나, 바람 소리를 듣고 있으면 먼 나라에서 당신이 책장을 넘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득한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던 당신을 다시 기억해 내고 보니, 그동안 잊고 살았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당신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말을 경청하던 모습과 나를 향해 미소짓던 눈빛이 생각났다. 비록 심성 좋은 당신에게는 일상의 표현이며 모든 사람을 대하는 따뜻함 이었다고 해도 그 사소함이 내게는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종소리처럼 남아 있었다.

​이제 겨울을 건너가기 위해 언 강 앞에 외롭게 서 있지만 마음을 씻고 비워내며 겨울로 가는 길 하나를 다시 만든다. 어쩌면 그 종소리의 기억이 있어 나는 그 강을 기꺼이 건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당신이 있어서 겨울이 좋다.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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