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84 )제42대 William Jefferson Clinton 대통령②

2019-12-09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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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는 자신의 분명한 주장이나 로선이 있어야 하지만 “완고”해서는 않되고 국민의 대세를 얼른 파악하여 “아부”를 하는것이 아니라 “순응”할줄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멀리 보이는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나아 가면서도 정치적 파도가 너무 높을때에는 최소한 으로 방향을 잠간 바꾸어서 파도와 “타협” 할줄도 알아야 한다. 혁신적인 정책이 있어야 하지만 자신의 정책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을 경우에는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할수있는 아량과 자신감도 있어야 한다. 적당하게 Showmanship 까지 가지고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Clinton 은 위와같은 기초적인 정치가의 덕목들을 비교적 조화롭게 갖추었던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가지 몹씨 안타까운 일은 그가 끊임없는 “성추문” 때문에 정적들의 잔인하고도 치사한 정략에 끌려 들어가서 1992년의 첫 대통령선거때 부터 곤욕을 치루었으며 두번째 임기중에는 국민의 존경심을 잃고 대통령으로서의 권위가 훼손된 가운데 탄핵까지 받아서 타고난 정치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일이었다.

Clinton 은 주지사 취임후 교육제도의 대폭 개선을 시작하고 도로들을 개보수 하였으며 부인 Hillary 는 도시민들의 건강제도 개선을 위한 위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자동차세금이 새로 부과되기 시작하자 주민들의 불평이 나기 시작하였고 Cuba 에서온 난민들이 수용소를 탈출하는일등이 발생하자 주지사가 원망을 듣게 되었었다. 결과적으로 2년 임기가 끝나고 주지사에 재출마했던 Clinton 은 낙선이 되었다.


그 2년후의 주지사의 선거에 재출마하여 당선된 Clinton 은 그후 10여년간 주지사를 연임하면서 주의 경기가 활성화 되도록 하였으며 노인들의 의약품구매에 sales tax 를 면제해주고 주택 부동산 세금을 감소시켜 주었다. 그는 아래와 같은 Arkansas 교육제도의 개선을 이루어 내었다.

또 다시 Hillary 를 위원장으로 한 교육제도 개선위원회는 Sales Tax 를 인상하여 교육예산을 증액하도록 하고 영재교육을 장려하고 직업교육을 강화하고 교사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교과목들의 다양화하며 교사들의 실력향상을 위한 정기적인 시험제도등을 건의 하였었다. Clinton 은 1983년에 특별 주 의회를 소집하여 교육제도개선을 위한 법률을 통과 시켰었다. 많은 주민들이 이 교육제도개선이 Clinton 의 주지사 업적중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이었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Clinton 의 주지사로서의 정책중에 한가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것이 그의 사형집행에 대한 생각의 변화이다. Arkansas 주에서는 1964년부터 사형집행이 중지되어 있었는데 본래는 사형집행 반대자 이었었던 Clinton 은 사형집행이 다시 되도록 하여 그의 주지사 재임중에 네명의 사형이 집행되었었다. 마지막의 사형집행 때에 Clinton 은 대통령선거 운동중이었었는데 일부러 Arkansas 에 돌아와서 사형집행을 승인 하였었다고 한다. 사형집행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을 참작했던 까닭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보수성”과 흉악범들에게 극형까지 주겠다는 결의를 부각시켜 보려고 하였던 일인지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Clinton 답지않아 보이는”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1988년의 대선때에 한참 인기가 높았었던 민주당의 New York 의 Mario Cuomo 주지사가 출마를 사양한후 Clinton 의 지지도 받았었던 Massachusetts 의 Michael Dukakis 주지사가 후보가 되었었으나 낙선 되었었다. 그때의 대통령후보 공천대회에서 Clinton 이 개회연설을 하였었는데 연설이 신통치 않았었고 33분이나 걸린 긴 연설이라 별로 호평을 받지 못하였었다고 한다.

1992년의 대통령선거에 Clinton 이 민주당 공천후보로 출마하자 과거에 있었다는 어느 여성과의 성추문 얘기가 튀어나오기 시작하였고 Hillary 가 Arkansas 의 법률법인에서 일할때 있었다는 부조리등이 튀어나와서 Clinton 부부가 해명하는등의 고난을 겪었는데 남부주들에서 지지를 받았던 Clinton 이 막강한 경쟁자이었던 California 의 Jerry Brown 전 주지사를 New York, Florida 와 California 에서 까지 이기면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았었다.
한편 Gulf 전쟁의 승리로 한때 지지율이 80% 까지 올라갔었던 Bush 는 공천대회에서 자신보다 더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주의자 이었던 Patrick Buchanan 의 도전을 받아 당내의 분열이 있었었고 또 대통령 재임중에 점증되는 예산적자를 줄여보고자 하여서 세금도 올려가며 민주당측과 타협을 시작하자 공화당 보수측의 반발을 받았었고 Clinton 으로부터는 공약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받았었다.

설상가상으로 Bush 의 재정실패를 공박하고 나선 H. Ross Perot 의 출마는 Bush 에게 큰 타격을 주었었다. 민주당이 너무 진보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해서 Reagan 을 지지했던 소위 “Reagan Democrats” 들도 Clinton 이 중도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하자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 섰었다. Clinton 은 국민투표에서는 43% 를 받았었으나 선거인단 표수로 370 대 168 을 얻어서 당선되었는데 동시에 민주당이 상하양원에서도 다수당이 되었었다. 민주당의 12년만의 압승이었다.

Clinton 은 8년간의 대통령 재임중에 여러가지 새로운 정책들을 내어 놓았고 중요한 법률들이 입법되도록 하였었다. 근래에 Trump 대통령이 엄청나게 비난해온 NAFTA 도 실은 공화당 Reagan 과 Bush 가 협상해 놓은것을 Clinton 이 노력하여 상원의 인준을 받아낸 것이었다.


그는 사회복지제도도 많이 개정하였는데 종래의 규정을 조금 까다롭게 만든 중도, 보수 적인 것으로써 민주당의 초진보측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개정이었다고 말할수 있었었다. 그러나 그는 예산적자와 국가채무의 감소를 위해서 보수적인 재정정책을 쓰기 시작하였고 그와같은 조심스러운 정책의 결과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평화시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내었다고 한다.

Reagan 과 Bush 의 시대에 매년 엄청나게 늘어났었던 재정적자가 Clinton 의 임기중에 줄어들기 시작하여 그의 대통령 재임 5년째 이던 1998년에는 690억불의 흑자가 났었고 1999년에는 1,260억불의 흑자가, 2,000년에는 2,360억불의 흑자가 났었다고 한다. 마지막 3년간의 대단한 업적이다. 그러나 국가부채 총액은 계속 조금씩 증가하고 있었다.

1993년 1월 20일에 있었던 제42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Clinton 은 “우리의 민주주의는 전세계가 부러워하는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이 정당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할때에도 해결될수 없는 문제는 없읍니다” 라는 격려와 희망에 찬 말로 취임사를 시작하였었다.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종종 국회가 입법한 법률을 “위헌”이라고 판결하여 “무효화” 시키기도 하며 가끔은 꼭 있어야할 법률이 없을때에는 판결로써 사실상 “입법”을 하기도 한다. 대법원이 어느 정도까지 법률위에 “군림”할수 있는가 라는 “정치적”문제는 미국 건국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뜨겁게 논쟁이 되어오고 있다.

아마 미국 역사상 가장 논쟁이 되어오고 있는 “대법원판례”중의 하나가 “Roe v. Wade” 라는 것인데 대법원은 이 판결 에서 “임신중절은 여성당사자가 결정할 권한이 있다”락고 하면서 임신중절을 불법화한 주들의 법률들을 “위헌”이라고 한꺼번에 무효화 시켜버렸었다.

지금까지도 대통령선거때 마다 공화당후보의 “공약 제3호” 쯤에는 “임신중절을 반듯이 불법화 시키겠다” 라거나 “보수적인 대법관들을 많이 임명하여 ‘Roe v. Wade’ 판례를 번복 시키겠다” 라는 주장이 꼭 들어가는데 Trump 대통령의 임명으로 보수적인 대법관들이 다수파가된 현 대법원이 금명간에 “Roe v. Wade” 판결을 뒤엎을것 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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