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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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미루지 말라

2019-12-06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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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저서 ‘도덕 감정론’에서 행복의 조건으로 건강, 빚이 없음, 깨끗한 양심 세 가지를 들었다. 돈이 많은 것이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가진 것은 없어도 남에게 갚아야 할 돈이 없음을 든 것이 소박하고 재밌다.

과거, 이민 1세들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별로 가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간단한 옷가지, 한두어달, 많게는 일년간 생활비, 뭐 그 정도? 성공한 1세들 경우 주머니에 단돈 200달러, 300달러들고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내렸다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장사를 시작하거나 직장을 다니면서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며 세월이 지나보니 우리의 재산은 자신도 모르게 커져있다. 늘 열심히 일해 벌어들였는데도 늘 돈에 쪼들린다면 우리의 씀씀이가 대폭 커진 탓이다.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 골프 여행이나 해외관광 등등, 처음 이민 왔을 때는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을 실제로 하면서 초심을 잊어버린 것이다.


현재는 이민 1세들이 이민생활을 마무리 하며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수시로 아는 이름들이 부고난에 등장한다. 이들 중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도 있지만 고생 고생하다가 세상을 하직하는 이도 있다.

본인이 자신의 삶에 몇 점을 주는 지, 이만 하면 잘 살았다 하는 지, 안하는 지 모르지만 누구나 자신이 미국에 잘 왔고 잘 살다가 간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내가 왜 미국에 와서 이 고생을 하다가 죽어야 하나, 한국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많은 것을 이루었을 텐데 하는 생각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후회이고 원망이고 버려야 할 한(恨)이다.

가슴 속 슬픔이나 노여움의 응어리가 맺힌 것을 한이 맺힌다고 하고 이 응어리를 푸는 것을 한을 풀었다고 한다. 한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정서라고도 한다.

지난여름에 귀신들이 한을 풀고 이승을 떠나는 이야기를 다룬 한국 TV드라마 ‘호텔 델루나’를 의미있게 보았다.

월령수에 묶여 생과 사의 흐름이 1,300년간 멈춘 호텔 여사장 장만월과 귀신을 보는 총지배인 인간남자 구찬성을 중심으로 호텔직원들의 다양한 사연이 소개된다. 500년 귀신 바텐더, 200년 귀신 객실장, 70년 귀신 프론트맨, 18세 인턴사원 등이 등장하고 선글라스 귀신, 엘리베이터 귀신, 해골귀신, 우물 귀신 등등 각자의 사연이 소개된다.

김선비는 한자가 아닌 글로 이야기를 지은 일이 탄로 나면서 장원급제가 취소되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데 작자 미상의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 등을 지은 조선최고의 로맨티스트로 소설에 등장하면서 기분좋게 저승으로 간다. 객실장은 딸을 낳고 가문에서 쫒겨나자 그 원망으로 시댁을 절손시키고자 하나 시댁의 마지막 자손을 임신 중인 여자가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의 성을 따르게 한다는 말에 왜 나는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며 가볍게 한을 푼다.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억울한 영혼을 한 명 한 명 달래가며 풀어줘 삼도천을 건너가게 하는 이야기가 참으로 감칠맛이 났다. 한을 풀고 가야 다음 생이 기약되고 그대로 갖고 있으면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다고 한다.

미주 한인들의 한은 무엇일까. 남편 따라 시댁식구만 있는 미국으로 와 먹고 사느라 수십년을 친정식구 경조사에 가지 못한 한, 서류미비자로 혼자 이곳에서 돈을 버느라 한국의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못본 한, 생업 현장에서 소수민족으로 인종차별 당한 한, 일단 누구나 고향과 친구를 떠나 외롭고 막막하게 살아 온 현대판 이산가족의 한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이루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 못해 본 한이라면, 뒤엉킨 한이라면 풀어야 삶도 풀어진다.

더 이상 미루지 말자. 애덤 스미스가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건강하고 빚 없고 올바로 살아왔다면 행복을 느끼라고.
당신은 평생 무엇을 해보고 싶었는가. 그냥 저지르라. 이 해가 가기 전에...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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