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꽃처럼 웃고 재미있게

2019-12-06 (금)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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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앞자락이 펄럭이며 다가 온다. 잿빛으로 물들이더니 기어코 거센 눈발을 날린다. 게으른 아침 흐릿한 창문 너머 반사되는 풍경에서 겨울의 시작을 확인한다. 따뜻한 실내에서는 한 오라기 낭만을 움켜 쥔 시인이 되지만, 미끄러운 바닥 휘청거리는 발길이 점점 두려워지는 겨울이다.

한 해의 끄트머리를 잡고 연줄 당기듯 팽팽하게 하루의 문을 연다. 그렇다 한들 습관에 젖은 일상은 크게 달라질 이유도 없지만, 아침이면 희망의 노래를 반복하는 일은 잠시 빌려 사는 세상과 끝까지 지켜야 할 약속이 아닐까.

최근에 스스로 자신의 삶을 놓아 버리는 안타까운 소식을 자주 접한다. 어떤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붙잡고 이겨 내야 한다고 소리쳐 본다. 거침없이 드나들던 문지방은 여전한데 눈길을 잔걸음으로 살펴가야 하는 나이가 되니 삶에서도 문득문득 조바심이 잦아든다.


무심하게 흘려 보내던 계절의 변화가 점점 크게 다가오고 의지와는 상관 없이 가속도가 붙은 시간과 타협 하며 아무 탈없이 지낸 하루를 감사하는 일상이 편하게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덜어내고 비워야 다른 한쪽이 채워지는 의미를 긴 시간을 통해서만 깨닫게 된다면 젊었던 한때의 오만함도 용서되지 않을까 우겨본다.

시간은 무한대의 경계를 뛰어 넘고 밤새 태평양을 건너 갔다 온 흔적을 남겼다. 치열한 정치다툼과는 상관이 없는 듯 손안에 펼쳐진 고국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처마 끝에 나란히 줄을 선 시래기가 갈무리 잘 된 농가의 여유로움으로 다가온다. 돌담 길 서리 맞은 감을 올려보다 상상의 끝에 매달려 달콤한 감을 쪼는 까치가 되기도 한다. 겨울의 장미 빨간 동백꽃은 추울수록 이름값을 올리고 붉은 가슴 숨죽여 겨울 아리아 흰 눈을 유혹한다.

몇 해전 오래된 친구들과 남해 여행중 여수의 돌산 대나무 숲을 오르다 동백꽃과 마주쳐 환호성을 질렀다. 계절을 앞질러 나온 꽃이어서 감탄을 했고 행운이라 여겨 더욱 즐거운 여행이었다. 지나고 보니 꽃 위에 꽃 송이 눈 속에서 친구들과 뒹굴던 그 한때가 꽃 중에 꽃이었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꽃을 피우려고 땀방울 떨구며 부지런히 수액을 퍼 올렸다. 세상을 향해 갓 돋아난 여린 잎으로 비바람과 맞섰고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초병처럼 두려움을 견디며 새벽 풀잎처럼 우뚝 일어섰다.

비겁하게 변명하거나 옹졸해 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치던 시절, 아무리 고단해도 발목에 힘이 남아있었던 젊음이 엊그제 같다. 지금은 한 겨울에도 모닥불처럼 피어 오르던 열정을 다시 불사르기는 힘들겠지만 따뜻한 온기로 주변을 데우며 살아 가자고 낮은 꽃으로 웃고 있다.

한 해의 마무리 글을 적어가다 오래된 기억의 책이 떠올랐다. 이근후 지음.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의 일부분을 소개한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갖 일을 겪으며 세상이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도 깨닫게 된다. 젊을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막막한 조바심이 있었다면 나이가 들면서 열린 마음이 되어간다. 결핍과 과잉의 저울질도 스스로 할 줄 알고 성공과 실패의 잣대도 사용할 줄 안다. 멀리 보라. 좋아하는 일을 택하라. 쉬운 것부터 하라. 제일 중요한 것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최종 결정은 스스로 하고 과거는 심심할 때 잠깐 불러내 가지고 노는 것쯤으로 생각하면 인생은 쉬워진다. ”

올해도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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