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혼수상태에서 부르는 유행가

2019-11-23 (토) 최정자/펜클럽 미동부지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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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나면 노랗게 물들던 창밖의 나뭇잎들은 이제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앙상하게 비어있는 나뭇가지 위로 겨울비가 내린다. 어떻게 지내느냐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빗소리와 함께 지낸다. 했다. “그렇구나, 빗소리와 함께 지내는구나.” 심드렁한 친구에게 미안 했다.

“실은 내가 아는 어른이 지금 혼수상태야. 그런데 혼수상태에서 유행가만 부르고 있대” “무슨 유행가를 불러?” “봄날은 간다.” “응, 그거 우리 남편이 살아있을 때 자주 부르던 노래였어.” 왜 그들은 ‘봄날은 간다.’를 부를까?

서울에서 85세의 아는 어른이 넘어져 혼수상태라는 소식이다. 그 어른이 들릴 듯 말 듯 입을 달싹여 계속 유행가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연분홍 치마가......,’를 부른다고 한다. ‘알뜰한 그 맹세......,’는 거듭 거듭 부른다고 한다. 혼수상태에서 자꾸만 유행가를 부른다는 소식은 나를 쓰리게 했다.


여자는 꽃다운 낭랑18세에 연분홍치마와 연두색 저고리를 입고 족두리 쓰고 시집을 갔다. 제법 살만한 집 딸만 둘인 집 맏딸로 태어나 동네 처녀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집으로 시집갔다. 헌데 그녀의 시집살이는 상상하기도 힘든 호되고 호됐다.

다만 남편의 사랑은 지극했다. 그래서 참아낼 수 있었다.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 여자는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다.

“몸이 너무 쇠약해졌으니 친정에 가서 반년쯤 몸조리 하고 오라”. 지독한 시어머니가 갑자기 인자하고 다정 했다. 그렇게 젖먹이를 떼어놓고 친정으로 간 여자는 반 년 동안 몸을 추스르고 다시 시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들 생각에 몸이 먼저 달려갔다. 시집의 대문 안에 들어섰다. 그녀가 대문 안에 들어서자 그녀의 방의 방문을 열고, 웬 여자가 마치 새색시 모양을 하고 나오는 게 아닌가? 여자는 그날부터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던 남편의 맹세는 흔적도 없었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아낸 여자는 딸과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데려와 키웠다.

여자의 남편이었던 남자는 지금 없다. 그 때까지 여자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는 나이 들어 함께 늙어가는 자식들이 “그까짓 것, 왜 이혼해주지 않았느냐” 했다.

“그까짓 것?” 자식들마저 자신을 몰라주는 심정, 원망할 길 없이 보낸 세월, 그 어른의 유행가는 ‘노래’가 아니다. 내내 그랬던 것처럼 결코 놓아버릴 수 없는 ‘목숨 줄’이었다.

<최정자/펜클럽 미동부지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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