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귀로(歸路)

2019-11-22 (금)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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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창 밖 풍경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간다. 잎을 놓아 버린 텅 빈 나무의 밑둥이 도드라져 보이고, 그 발치에 고스란히 쌓였던 낙엽들마저 바람을 따라 숲으로 돌아갔다. 자신을 내어준 자연에게로 돌아가는 여정이자, 새로운 탄생을 꿈꾸는 귀향을 '순환' 이라는 부르며 받아 들인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가을이 지나가며 남겨 놓은 흔적을 회한이나 미련으로 읽지 않고 '비움'이라 읽기로 한다.
​그날, 가을이 산(山)을 서둘러 떠난 이유를 눈부신 가을을 온전히 품지 못한 산(山)의 탓으로 생각했었다. 산(山)은 기다림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듯 했지만, 남겨진 가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에게는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쓸쓸했다.
​지난 가을에서 보면 분명 한 해를 더 살았다. 여전히 '비움'과 '내려놓음' 에 대한 질문은 유효하지만 이것 또한 순환의 다른 이름이라 여기며 익숙해지기로 한다. 돌이켜 보면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들은 많이 낡은 것들 뿐이어서 이미 잊혀 졌거나 쓸모 없어져 버린 것이었으나, 나는 그것을 마치 나를 지탱해 주는 힘으로 여기며 살아 왔었다. 어쩌면 움켜진 손을 펼쳤을 때 정작 아무것도 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계절이 지나가기 전에 한번쯤 돌아 볼 여유를 갖고 싶었다.
​키 큰 나무 꼭대기에 한 무리의 기러기들이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모두 날아가 버릴 것 같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카메라를 가져와 담아 보려다 포기하고 지켜보기로 한다. 책을 뒤척였지만 이미 나는 다른책에 마음이 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가을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은 가을을 놓아 버리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놓기를 망설이고 있음을 그제서야 알았다.
​새들이 쉬어가던 나무는 이미 가을을 보냈다. 석양을 보며 녹이 슨 의자에 깊숙히 앉아 있던 앞 집 노인이 담베를 꺼내 피우고 있었다. 나무를 바라보는 노인이 나처럼 스러진 가을의 흔적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첫눈을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노인의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가을은 천천히 스미고 또 사라졌다. 밤은 이전보다 더 깊어졌고, 조금씩 그 어둠에 익숙해져 간다. 천천히 걸어도, 서둘러 걸어도 여전히 길은 미로처럼 이어져 내 발 밑에 놓여 있다. 허둥대는 발걸음에 위로를 건네고 싶었지만 옹졸한 마음은 그마저도 거부한다. 아직은 견딜만 하다는 오만으로 간신히 지탱하던 몸이 바람에 휘청거린다.

​움츠려든 그림자 하나가 넘어가는 노을을 붙잡으며 먼 산을 바라본다. 가난한 마음은 이미 누더기가 되었지만 이제 그것을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로 한다. 그 그리움이란 것이 마치 정거장 저 편에 나를 세워 두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마음 같아서 조금은 안쓰럽다. 여전히 마음으로는 비우기를 나무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덜어 내는 일이 어찌 그렇게 쉽겠냐며 합리화 하는 자신과도 적당히 타협함을 잊지 않는다.
빈 숲에서 비로소 산이 온전히 보이고 산 너머의 산에도 눈길이 간다. 시간이 되어 그 계절까지 가슴 깊이 품고 난 후 산은 다시 그 계절마저 다시 내려 놓을 것이다. 나무들은 한겹씩 마음을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고, 나는 더 헐벗은 날을 받아 들일 때 까지 그저 바라볼 뿐이다.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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