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움의 힘

2019-11-08 (금) 김창만/ 목사·AG뉴욕신학대학(원)학장
크게 작게
“기성자는 싸움닭 만드는 유명한 조련사다. 하루는 왕의 부름을 받고 싸움닭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왕이 물었다. ‘이제 준비되었는가’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 제 기운만 믿고 허세를 부리면서 마냥 사납기만 합니다.’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열흘이 지나 왕이 다시 물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도 다른 닭소리를 듣거나 그림자만 보아도 곧 달려들어 싸울 듯이 흥분합니다.’ 또 열흘이 지나 왕이 다시 물었다. ‘아직도 덜 되었습니다. 다른 닭을 보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데 그 눈에 교만과 아집이 가득합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 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물었다. ‘이제는 거의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아무리 소리를 치고 덤벼도 전혀 동요함이나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과 같습니다. 비움의 덕이 중후하고 위엄이 있기 때문에 다른 닭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달아나고 맙니다.’


-장자의 우화, ‘목계’ 중에서
싸움닭에는 세 가지 수준이 있다. 제일 하수(下手)는 마음속에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하여 무턱대고 날뛰는 닭이다. 이런 닭은 한 번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패한다. 중수(中手)는 싸우기만 좋아하고 허세가 가득한 자다. 이런 닭도 승산과는 거리가 멀다.

최고의 고수(高手)는 어떤 상대가 나타나 덤벼도 한 치의 동요함이 없는 닭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 목계(木鷄)과 같다. 제 힘과 기술만 의지하는 자만에서 벗어나 마치 나무로 만든 닭처럼 마음을 비워 초연하고, 싸운다는 의식에서 조차 자유로운 닭이 최고 고수다. 이런 닭은 누구와 싸워도 이긴다.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문은 272 단어에 불과하다. 연설은 단 5분으로 끝났다. 272개의 단어 안에는 “나(I)라는 단어가 한 자도 안 나온다. 대신 우리(We)라는 단어는 여러 번 반복되었다. 놀라운 자기 비움이며 절제다. 비움과 절제의 언어로 다듬어진 링컨의 연설문은 전쟁으로 상처 입은 백성의 마음을 치유했고 분열 직전의 나라를 구해 통합을 이뤘다. 비움은 최고의 덕이며 힘이다.

<김창만/ 목사·AG뉴욕신학대학(원)학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