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뉴욕시의 노숙자 주거지원법

2019-11-06 (수) 손경락/ 변호사
크게 작게
지난 10월 5일 새벽 맨하탄 차이나 타운의 바워리 스트리트(Bowery Street) 군데군데서 흩어져 자던 노숙자들이 묻지마 폭행을 당해 모두 4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른 것으로 알려진 살인 용의자는 로드리게즈 “랜디” 산토스(Rodriguez “Randy” Santos)라는 20대 청년인데 그 역시 두 달 전 감옥에서 출소 후 바워리 지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현재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다.

이 사건은 날로 심각해져가는 뉴욕시의 노숙자 문제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는데 통계에 따르면 2019년 8월 현재 약 6만2,000명의 노숙자가 뉴욕시 관할 노숙자 보호소를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숫자는 5만287명을 수용하는 양키스 구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숫자로 1930년대의 경제대공황 이후 최고치라고 한다. 보호소가 아닌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자의 수도 3,6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 전체에서 노숙자 수는 캘리포니아 주가 제일 많으나 대도시 단위에서는 뉴욕시가 단연 으뜸이다. 두 지역에 유독 노숙자가 많은 이유는 두 곳 다 집세 등 기본 생활비가 비싸 실직 등으로 수입이 끊길 경우 쉽게 길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환경인 데다 사람들이 붐비는 대도시여서 구걸행위가 용이한 것도 한 원인으로 추측된다.


특히 뉴욕시는 캘리포니아에 비해 혹독한 겨울이 있어 노숙하기에 매력적인 곳은 아니나 오래 전에 만들어진 노숙자 주거지원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지원법은 이번 노숙자 살인 사건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 1979년 10월 칼라한 對 캐리(Callahan v. Carey) 사건을 계기로 제정되었다.

26살의 로버트 헤이스(Robert Hayes)는 NYU 법대를 졸업하고 월가의 유명 로펌에서 일하던 전도 유망한 변호사였다. 헤이스는 NYU 재학 당시 학교 앞 워싱턴 스퀘어 공원의 많은 노숙자들을 보고 그들을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중 마침 같은 문제로 고민하던 두 명의 컬럼비아대생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의기투합한 이들 3명의 청년들은 노숙자들과 인터뷰 등을 통해 그들을 돕는 가장 확실하고 항구적인 방법은 법률에 바탕을 둔 제도적 지원책이라 판단하고 세 명의 노숙자를 앞세워 맨하탄 소재 주법원에 당시 뉴욕주지사 휴 캐리(Hugh Carey)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대표 원고는 53살의 로버트 칼라한(Rob ert Callahan)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칼라한 역시 이번 살인 사건이 일어난 바워리 출신의 노숙자였다.

뉴욕주 헌법 17조 1항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과 지원은 공적 관심사(public concern)이기 때문에 의회 결정에 따라 뉴욕주 및 그 하위 기관은 보호책을 마련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뉴욕시가 노숙자들에게 주거지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이 조항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헤이스 변호사는 주장했다. 그는 뉴욕주지사와 시장에게 바워리의 노숙자들을 위한 침대 750개 규모의 보호소를 제공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재판장에겐 추운 겨울이 오기 전까지 신속하게 판결을 내려줄 것을 주문했다.

최후 변론이 끝나고 본격적인 겨울을 앞둔 12월 5일, 앤드류 타일러(Andrew Tyler)판사는 뉴욕주 헌법에 따라 뉴욕시는 바워리의 노숙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고 이 판결은 이후 뉴욕시민들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중요한 지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인간의 주거문제는 세계인권선언문에도 명시된 주요 인권 중 하나이지만 미국에서도 이처럼 법적으로 그 권리를 보장해 주는 곳은 아직 워싱턴 D.C.와 매사추세츠 주, 뉴욕시 등 세 곳밖에 없는 실정이다.

<손경락/ 변호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