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우리 자신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적용할 생존법칙이다. 2012년에 나온 ‘반(反)약골 : 무질서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Antifragile : Things That Gain from Disorder)’은 뉴욕대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의 저명한 교수인 ‘나심 니콜라스 탈렙’의 저서다. 2007년에 나온 그의 베스트셀러 ‘흑조 (Black Swan)’의 속편으로 흑조는 전쟁이나 인터넷 등장과 같은 예측불허의 엄청난 사태를 의미한다.
날로 증가하는 불확실성과 휘발성에서 야기되는 위험과 삶의 덧없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저자는 강골이 되라고 한다. 온갖 스트레스, 시행착오와 변화 등에 허우적거리며 혼돈에 빠질 게 아니라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역이용하자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풀이하자면 마음먹기에 따라 전화위복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탁상공론으로 배울 수 없고 실생활에서 삶을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인생이란 학교에서 꾸준한 인간수업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세상에 그림자 없는 빛이 없듯이 실망하지 않을 기대란 없을 테고 상처 받지 않을 사랑도 없을 것이다. 사랑을 모르는 인형이, 고독을 모르는 동상이, 눈물을 모르는 조각이 되기보다, 거짓을 외면한 진실을 찾지 말고 자연을 외면한 진리를 찾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알뜰살뜰한 사람이 되는 것이 최상의 인간수업인 것이다.
우리말에 같은 이슬이라도 매미가 먹으면 노래가 되고 벌이 먹으면 꿀이 되나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독도 약이 될 수 있지 않던가. 그러고 보면 세상에 버릴 게 없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조화가 아니면 무엇인가.
소년시절 나는 코스모스가 좋았다. 이유도 없이 그저 좋았다. 그 청초한 모습과 하늘하늘 곱고 아리따운 자태 때문이었을까. 코스모스의 꽃말이 소녀의 순정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청년이 된 나는 코스모스를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코스모스 같은 소녀를 찾아 나섰다. 혼돈과 혼란의 격동기인 전쟁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의 상징 같은 코스모스를 찾아 다녔다. 코스모스 같은 아가씨가 눈에 띄면 나는 원초적 그리움 솟구치는 나의 사랑을 고백했다. 타고난 태곳적 향수에 젖어 정처 없이 떠돌아 방황하던 시절, 사랑의 순례자가 된 나는 독선과 아집으로 화석화된 어른들의 카오스적 세계가 보기 싫었다. 그래서 순수한 사랑으로 코스모스 속에 새로 태어나고 싶었다.
현재 있는 것 전부, 과거에 있었던 것 전부, 미래에 있을 것 전부인 대우주를 반영하는 소우주가 인간이다. 나는 대우주인 코스모스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인생 순례자이며 우주나그네다. 저 우주의 주인이 바로 내 자신임을 깨닫는 것이 ‘코스미안’이다. 코스미안의 길에는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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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상/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