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단풍과 낙엽

2019-10-30 (수)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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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바지 가을에 접어들면서 나무의 푸르르던 잎새들이 어느새 색깔을 제각기 바꿔 입고 하나 둘씩 땅으로 떨어지고 있다. 노란색, 빨간색, 심지어는 검은색까지 저마다 다른 빛깔을 하며 온 산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그야말로 만산홍엽의 아름다운 전경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단풍 잎새라도 결국은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만다.

단풍을 보게 되면 자연히 우리 인간의 생과 같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형형색색의 나뭇잎은 인간의 삶에서도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고, 각자 살면서 자신이 거둔 결과에 따라 색깔을 아름답게, 혹은 추하게 내는 것과 흡사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또 아름다운 빛깔의 단풍잎새라도 낙엽이 되는 것은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결국은 다 사라지게 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단풍을 보면 우리 자신도 과연 저 고운 잎새처럼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삶을 살아 왔는가 반추하게 된다. 그리고 또 남은 삶도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단풍은 땅에 떨어지면 다음해에 다시 소생할 자연을 위해 퇴비가 된다. 다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이들 잎새처럼 후세를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간다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일인가. 살기 위한 푸르름에서 새롭게 옷을 갈아입듯 온통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만인에게 흠뻑 즐거움과 기쁨을 잔뜩 주고 유유히 떨어지는 단풍과 낙엽. 이들의 모습을 우리들도 새로운 교훈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내 한 목숨도 한 잎의 노랗고 붉은 가을 단풍처럼 아름답게 물들고 마지막엔 빈손이 되어 값진 일을 하면서 삶을 마감하면 어떨까 생각해볼 일이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단풍처럼 인간사회를 아픔답게 물들이고 세상을 밝고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난 위대한 사람들이 꽤 있다. 오지에서 자신이 배운 의술과 학문으로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의 흑인들을 보살피며 그들과 함께 죽어간 알베르토 슈바이처 박사, 의술로 세상을 밝게 변화시킨 히포크라테스, 흑인의 고통과 눈물을 닦아준 에이브러햄 링컨, 흑인권익 보호와 향상에 몸 바친 마틴 루터 킹 목사 등등... 이들은 모두 자신의 부를 위해 애쓴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상과 인류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생을 불태우고 간 인물들이다.

인간의 생은 가을낙엽과 같다고 했다. 우리는 매일 허덕이고 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니다. 생로병사라고, 태어나서 힘들게 살다가 늙어가면서 병들고 죽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전부이다. 한마디로 아침 이슬처럼 잠깐 왔다 가는 것이다. 묘지로 행상을 메고 가는 사람도, 항아리를 납골당으로 옮기는 사람들도 모두 죽게 되어 있다. 스위스의 사상가 칼 힐틸의 말처럼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그 것은 모두 죽음의 길에 놓여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천년 만년 살 것 같이 아우성치며 하나도 가져갈 수 없는 돈 모으기에만 혈안인 듯 보인다.

어차피 인간은 불완전하다. 세기의 현자 소크라테스도 자기가 믿고 위지하던 의술의 신에게 평생 술 한잔 따라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감옥에서 제자들에게 그에게 술 한잔 대신 따라줄 것을 부탁하고 죽었다. 또 과학의 기초를 놓은 유명한 천체과학자 탈레스도 별을 연구하며 하늘을 쳐다보다 웅덩이에 빠진 사실이 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왕 떠날 바에는 우리도 위대한 사람들처럼 남을 위해 사는 마음이 되어 살다 가면 좋지 않겠는가.

아무리 실수를 한 현자나 과학자들도 설사 실수는 할지언정 자신을 위해서 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이 두고두고 이 세상에 남아 빛을 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들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작게나마 우리도 이웃을 생각하고 돕고 보살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가을 아름다운 단풍과 낙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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