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월의 끝자락에서…

2019-10-29 (화)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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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은 일년 중에 감성이 가장 풍부한 달이다. 청춘남녀들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새로운 출발도 많이 했다. 여기저기선 축제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의 축제가 끝나니 아름다운 자연의 축제가 이어지고 있다. 갈대, 들국화, 울긋불긋한 숲자락, 산과 바다 등등. 시월이 가을인 이유다. 그런 시월이 이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시월이 며칠 안 남았다. 하루 건너 하루 비가 온다. 스치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날씨는 점점 차가워진다. 계절은 그렇게 한 순간 변해간다. 찬 바람이 단풍을 재촉한다.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인데 나무들은 아직 푸르다. 단풍도 이제야 꽃단장을 시도하고 있다. 짧은 가을이 아쉬워 도심을 벗어난다. 그곳에서 자욱한 안개로 아침을 연다. 밤새 내린 비에 촉촉해진 대지. 그 덕분에 유난히 짙은 안개가 마치 구름이 이동하는 것처럼 움직인다. 신비스러운 가을 풍경이다. 하지만 그곳은 도심과 달리 어느새 가을앓이가 시작됐다. 바람에 낙엽이 속절없이 떨어진다.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나무들이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서지만 역부족인 듯 하다. 강한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자 앙상한 가지들이 늘어난다. 시월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가을 역시 그렇다. 시간을 따라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다.

온몸으로 가을을 맞고 있는 시월의 마지막 날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70-80세대들은 이날 이용의 ‘잊혀진 계절’의 노래로 옛추억을 떠올린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을 슬퍼요. 나를 울려요.’라는 가사를 흥얼거리면서.

철부지 자녀들은 이날 다양한 복장으로 핼로윈 데이 축제를 즐긴다. 핼로윈 데이의 유래는 2,500년 전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의 켈트족들은 10월31일을 일 년의 마지막 날로 지켰다. 새해가 오기 전날인 이날 죽은자의 영혼이 활동할 수 있는 날이라고 믿고 그들을 추모했다. 이것이 오늘날 축제로 바뀌어서 주로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 핼로윈 데이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아이들이 귀신복장이나 가면 등을 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탕이나 초콜릿을 얻으러 다니는 날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핼로윈 데이 행사를 사탄추모(?) 행사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10월의 마지막 날이 기독교인들에게도 참으로 의미 있는 날로 여기면 될 일이다. 바로 종교개혁일이기 때문이다. 1517년 10월31일은 독일인 마틴루터가 당시 봉직하던 대학교 부속 예배당에 95개 조항의 면죄부에 대한 항의성 문서를 개시한 날이다. 그 여파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오늘날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찾게된 이유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바로 개혁적인 신앙의 의미를 되새겨야할 날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시월 마지막 날의 의미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시월의 끝자락에서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어떨지 생각해본다. 마치 천년만년 영원히 살 것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기에 하루하루 값없이 보내 버릴 때가 너무 많지는 않은지. 상처받는 과거에 집착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염려 하며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왜냐하면, 과거와 미래에 붙잡혀 오늘을 낭비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오늘 이 순간은 더 이상 잡아 둘 수 없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억겁 속으로 시월도 이제 사라져가고 있다.

세월이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을 느낀다.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적어질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을 속으며 스며들다보니 어느새 시월의 끝자락에 와있다. 이제 10월이 지나면 11월이다. 그 11월의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다. 올해는 추운 겨울이 일찍 찾아올 것 같다. 문득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가을은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이루지 못한 게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볼만한 완벽한 시간”이라고했던 그 말이.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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