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구석구석 미세 먼지가 뽀얗다. 몇십년 만에 집수리를 하면서 한바탕 들춰 놓은 집안을 정리하기가 쉽질 않다. 까맣게 잊고 있던 물건들이 구석구석에서 나타난다.
작은 수첩 하나에도 ‘누가 언제 어디서…’가 적용되는데, 수십 권 사진 앨범 속엔 6하원칙을 따른 스토리가 이루 헤아릴수 없다. 빨간 세일 가격표 $4.99가 붙어있는 ‘틴에이지 닌자 터틀’ 비디오 테입. 닌자 터틀 게임에 매달려 살던 그 아들이 지금 아들을 낳게 생겼는데, 이 비디오를 잘 두었다가 아들의 아들에게 줄까 하, 어느 세월에.
버리는 일이 어렵다더니 정말 어렵다. 이거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하며 한 없이 늘어진다. 순식간에 흘러간 것 같아도 터벅터벅 살아 온 길이 만리장성인 것이다.
아주 오래전 여행지 플리마켓에서 사온 꽃무늬 포플린 향 주머니가 서랍 깊숙히서 나타난다. 아직도 라벤다 향이 나서 놀란다. 그 때 같이 간 50년지기 친구. 요즘 무척 바쁘다는데, “뭐하니, 잘 있지 ”속으로 말한다. 선반 뒤 꽃병에서 잊고 있던 한 사람을 꺼집어내어 뿌연 기억을 문지르며 그가 놓였던 자리로 돌아가 본다. 아련하다. 지금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내 생각 안할까?
먼지 묻은 물건 하나하나에 새로운 등장인물이 끼어들며 대하드라마를 쓰는 나를 본다. 물건 정리가 아니라 사람을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돈의 8촌까지 일가친척 다 합치고, 친구들, 동료들, 이웃들, 온갖 모임의 동반자들 그리고 소매 끝만 스친 사람까지, 오랜 살림 켜켜마다 별사람이 다 등장을 한다. 누구는 그들을 일컬어 ‘스쳐간 사람’이라고 하던가. 스치다니, 내 인생 양탄자를 한줄 한줄 촘촘히 엮어낸 사람들이다.
얼굴도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상상해보는 사람, 혹시 어디서라도 만나게 될까봐 걱정되는 사람, 친했어도 서로 질투하는 사이도 있었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엔 다르게 행동할텐데,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이 순간 온갖 색깔로 나와 인연을 엮고 있는 사람은 누구 누구인가? 친하게 지내다 얼마 전 딴 곳으로 이주한 사람까지, 몇 명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 사람들 중 누구는 오늘도 내 화폭에 또 까맣게 그림을 그려 될 텐데. 물론 인생이라는 그림에는 어두운 색도 필요는 하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칠을 해대는 인간이라면 아예 끝을 낼 것을 그랬나?
돌이켜 보면 싫은 사람, 미운 사람 많았어도 도저히 무 자르듯 할 수 없었던 것이 운명이었을까, 후에는 엉뚱하게 상황이 바뀌고 또 스스로 자리를 떠난 사람도 있으니, 이런 인연들이 운명인가보다. 사람을 정리하다니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지금 내 손 안에서 추억 들추어 대는 온갖 물건들. 왜 잘 모셔두었었는지 뚜껑 여는 핸드폰까지 나온다. 그래. 다시 쓸 일이 없으면 두 번 생각말고 빨리 버리자. 스쳐 지나간 옛 사람 생각일랑 생각 말고 집 정리나 잘하자.
<
노려/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