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마리아의 비밀

2019-10-12 (토) 김경희/ 소아과전문의
크게 작게
17세 고등학생 마리아가 진찰실로 들어 왔다. 의례 하는 여름 잘 지내고 있느냐로 시작해 특별한 문제는 없느냐 묻자 아무 문제가 없다며 웃는다. 머리, 목, 가슴을 진찰 하며 Period 는? 하자 두달 전이라 하더니 자기는 불규칙해서 한두달 건너는 건 예사라 한다.

남자 친구는? 없는데요. 마리아의 배에 손을 댄 내 손이 흠칫하고 가슴이 철렁 한다. 배에 혹?, 얼른 기록을 보니 육개월 전 목이 아프다고 왔었는데, 그때에는 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피 검사, 소변 검사 하는 겸에 임신 검사도 했다. 잠시 후 간호사가 날 방 밖으로 불렀다. “She is very pregnant” 엄마는 남동생과 대기실에 있어요. 데려 올까요? 한다.

엄마와 딸 둘이서만 얘기 하도록 해주고 다음 환자를 보고 있는데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모녀가 울며불며 털어놓은 얘기는 날 아찔하게 했다. 의붓아버지가 그녀가 열 서너 살 때부터 그녀에게 성행위를 해왔다는 고백이었다. 그 동네 공장에서 일 하는 의붓 아버지와 마리아의 엄마 사이에는 여섯 살 난 아들도 있다.


울고 있는 엄마에게 경찰과 아동보호기관에 보고해야 하는 내 의무와 절차를 알리고 산부인과에 연락을 한다. 산부인과의 회답은 임신 사개월. 그동안 입덧도 했을 거고 배도 꽤 부른데 어떻게 엄마가 몰랐을까. 하지만 엄마도 일을 하고 늦게 저녁을 먹을 때나 서로 얼굴을 보며 사는 그들의 생활, 배를 감추는 건 아직까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아동복지요원의 보고가 왔다. 아버지가 자기 행동을 순순히 인정은 하면서도 자기는 항상 콘돔을 썼기 때문에 애 아버지는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는 거였다. 기가 막혀 웃을 수도 없었다. 엄마는 그날 저녁 아이들을 데리고 호텔로 나와서 이혼을 요구 했다는 거다.
마리아의 임신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엉망이 된 그 날은 내 모든 환자 가족에게 나의 은퇴계획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다음 날이었다. “환자 복 많더니 막판에까지 이런 폭탄을 우리에게 안겨 주어야 합니까?” 하며 나와 이십년을 함께 일한 간호사의 섭섭함이 섞인 불평을 뒤로 하고 난 은퇴를 했다.

얼마 후 간호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리아 기억 하시죠? 물론! “ 마리아가 아이를 낳았고, 잘 살고 있답니다. 물론 의붓아버지는 빼고요. 사실은 마리아에게 엄마가 싫어하는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와의 사이에 임신이 알려지면 엄마가 그녀를 집에서 내쫓을 거 같아서 그 사실을 감추려다가 그보다 더 거창한 첫 번째 비밀이 터졌던 거예요.” 이제 마리아의 엄마가 아들, 딸, 딸의 남자 친구 그리고 손자까지 모두 데리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김경희/ 소아과전문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