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스페니시 엄마

2019-07-30 (화) 노려/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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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눈

잔디 깎는 사람을 바꾸었다.
나무 주위를 북돋아주었다는 항목으로 꾀 많은 돈을 청구했기에 가보니, 다 죽어 갈색이 된 향나무 밑 둥이에 땅을 둥그렇게 파 놓았다. 불평을 하자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밑의 일꾼이 했다고 한다. 그 동안 가드닝 비즈니스가 커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만스러운 일이 많던 차에, 동네 어느 집 잔디밭에 두 명의 남자와 여자 한명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차를 멈추었다. 여자 정원사는 처음 봤다. 우리를 본 여자가 다가와 얘기를 듣고는 젊은 남자를 불러 스패니시로 말을 주고받더니, 전화번호를 준다.

우리 집에 한번 오라고 한 날, 이번에는 우루루 4명이 왔다. 남편과 부인 그리고 두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전혀 영어를 못했고, 엄마는 좀 알아듣고는 무슨 말에나 웃으면서 대답을 하고, 20대쯤의 아들 둘은 영어를 잘했다.
오케이 오케이, 값을 정하고 마당일을 맡겼다.


아들이 잡초를 자르고 떨어진 나뭇가지를 바람으로 날리는 동안 아버지는 잔디를 깍고, 엄마는 쓰레기 봉지를 들고 아들과 남편 뒤를 따라다니며 뒤처리를 했다.

남자들은 건축공사판에서도 일하고 겨울엔 눈 치우는 일을 하며 부인은 청소 일을 한다고 했다. 온 가족이 1년 내내 풀가동인 것이다. 전형적인 이민 가정이다.

나도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때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던가. 하루에 1시간만 더 있었으면 할 때가 있었다. 돈을 벌고 벌어도 학비가 모자라 허리끈을 졸라매던 시절. 이제 그 힘든 세월 잘 견뎌내고,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하는 줄 알았던 나는, 여름 햇볕에 남자들 틈에서 땀 뻘뻘 흘리며 일하는 여자에게서 문득 내 모습을 보았다.

우리 한인들이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는 스패니시들과 관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알고 보면, 그들 중에는 자기 나라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있고, 우리 한인들처럼 그야말로 자녀들을 미국 주류사회로 진출시키려고 밤낮으로 애쓰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내가 알고 있는 에콰도르 여자가 딸이 대학을 간다고 했다. “축하해요. 어느 대학교?” 하자마자 ” NYU”한다, 나도 모르게 ‘와우, 와우'를 연발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학교 이름인 것이다. 이 여자는 처음 와서는 청소하는 일을 했고 그러다가 가게 종업원으로 일요일 없이 일을 하다가, 얼마 전에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을 만나러 에콰도르에 간다고 했었다.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딸이 NYU 간다고 하자, 나도 모르게 그 여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맞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하는 저 모습이 바로 나 아니었던가?

여기 한국인들, 이민자를 한데 싸잡아 죄인 취급하는 트럼프 시대인 지금, 잔디 깎는 일을 하는 스패니시 엄마와, 청소부 일을 하던 스패니시 엄마와 무슨 별다른 차이가 있단 말인가. 얼굴색으로 일괄 취급을 당하는데 말이다. 우리 한국인들이 지금 잘 먹고 잘 입고 고급스런 문화생활을 한다고 마음 놓고 거드름을 부릴 처지가 아닐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눈총 받는 이민자다.

먹고 살자고 죽기 살기로 온 사람들의 어린아이를 따로 잡아 가두는 공포의 이 나라에서, 과연 ‘아메리칸 드림’이란 단어가 무슨 말인가 싶다.

<노려/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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