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산속 한 마을에, 노인을 제물로 바친 다음 먹어버리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다가 노인이라곤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고, 대대로 내려오던 관습도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주민들이 그들이 다 모일수 있는 큰 집을 짓기로 하고 나무를 베었다.
그런데 통나무의 아래위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대들보를 어꾸로 세우면 집이 무너져 죽을 수도 있었다.
그때 어떤 젊은이가 더 이상 노인을 잡아먹지 않겠다고 약속 한다면 해결책을 내놓겠다고 제안 하자 다들 혼괘히 약속 했다. 젊은이는 오랫동안 숨겨 놓았던 자기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왔다. 그리고 노인은 통나무의 아래 위를 구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디가 위고 무엇이 아래 있는지 아는 현자들을 잃게 된는 일이 허다하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의 조각들을 어떻게 짜맞출 수 있는지, 공동체와 사회를 받쳐 줄 견고한 집을 어떻게 지을 수 있는지 가르져 주는 노인이 필요하다.
지혜가 무엇이고 노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 이 예민한 감각을 발전시킬 때 사회가 품고있는 보화를 발견하고 보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년의 가치를 소중이 여기는 자세는 늙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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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일간지 동경 특파원의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다. 노인들을 위하여 수퍼에서 식료품을 진열하고 그 가격표를 낮게 부친다. 허리가 굽어 시야가 낮아지는데 대한 배려이며 안내하는 말이나 방송은 목소리를 높혀서 한다고 한다.귀가 어둡기 때문이다. 모든 매장에는 시니어 코너가 살성되어 있다고 한다.이외에도 실제적인 제도를 만들어 노인들을 품고가는 사회가 융성해 진다는 의미 일 것이다.
말하자면 통나무의 위 아래를 구분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노인들을 특별히 잘 보호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날마다 늙어 간다. 예외란 없다. 그러므로 늙음에 대한 숙고는 노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중요하다. 늙어간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만 삶은 성취된다.
늙지 않는 사람은 없다. 늙음에 대한 성찰은 인간의 신비에 대한 성찰이 아니겠는가.이 모든 것은 자연 현상이다. ‘오류 속에 진실이 있고 그림자 속에 태양이 있다.’ 이러한 모순된 사실을 일찍 깨닫고 의연하게 시간과 싸우면서도 감상에 젖지않고 자기를 절제하며 어둠 속에서 계속 빛을 찾는 사람은 시간과 싸워 늙어도 추하게 보이지 않고 원숙하며 더욱더 인간의 위엄을 보인다는 것을 나는 가끔 발견한다.
등산을 하다보면 높게 자란 나무의 그늘에 가린 키 작은 나무를 볼때 나는 내 삶의 방식 으로 해서 그늘 속에 놓이게 되는 내 주변의 노인들을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온갖 세월의 시련을 겪은 노인의 주름진 얼굴 모습 히끗 히끗한 머리, 그것은 그 어떤 삶의 풍파도 견뎌내며 인생의 격정을 이겨낸 노년이 젊은 날에 재기발발함 보다 아름다울 때가 있다.
영혼의 성숙이 빛보다 더 밝게 빛날 때가 있다. 결코 썩지 않은 내면의 성숙이 유한한 인생의 흐름을 거슬어 맹위를 발휘할 때도 있다. 바로 노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나마 위안을 얻곤 한다.
한국은 10월2일이 노인의 날이다. 탑골 (파고다 )공원에 노인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들을 상대로 하는 점포들이 최저임금 인상으로 문을 많이 닫았다고 한다.
자기가 탓 조각배 보다 더 큰 고기를 잡고 3일간 망망 바다에서 홀로 사투하는 노인의 지혜와 의지와 용기로 결국 살아 항구로 돌아오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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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업/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