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5일 오후 3시50분에 총재님께서 영면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20년 전 자식을 잃었을 때도 영안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는 순간 분노심 때문이었는지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부인께서 담담하게 전해주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통곡에 가까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하시며 가족 외에는 교회에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셨다고… 고인의 유언이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루라’는 뜻에 따라 장례식을 끝내고 가족 묘지에 모셨다고 했다.
내가 총재님을 처음 뵌 지는 1974년 11월4일 뉴욕한국라이온스 클럽 창립 기념식장에서였다.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시어 한인으로만 구성된 한인라이온스의 역사를 새로 출범시키셨다.
환영사를 하셨을 때였는데 일부러 음성을 낮추신 음정이 아니고 원래 본인의 인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톤으로, 차터 기념사를 유창한 영어로 차분하게 구사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잊을 수가 없다.
회고해 보니 지난 43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가문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춘부장님께서 장안의 명성 높으신 의사이셨다는 것도 남을 통해서 들었다. 본인이 명문대 출신 이라고 밝힌 적도 없고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시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속어(俗語)로 표현해서 총재님은 목에 힘을 주거나 자신의 학력, 재력을 과시하는 다른 어떤 사람들과는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의 겸손, 겸양의 미덕이 몸에 베인 인격자이셨다.
70여개의 뉴욕지구 라이온스 클럽을 관장하는 총재직을 맡으면서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이신 것은 물론, 무역회사에다 태권도장까지 운영하고 대학 강좌까지 맡으시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그야말로 타에 귀감이 되는 어르신이다.
더욱 애틋한 감회를 금할 수 없는 것은 지난 3년여 간 자주 뵐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셨을 뿐 아니라 융숭한 식사 대접까지 해주시고 저희 내외에게 베풀어주신 한량없는 배려와 극진한 사랑을 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청천벽력 같은 총재님의 비보를 접하고 쓸어내린 가슴 속 한 구석엔 아직도 눈물이 서려 있다. 이제 두 번 다시 뵐 수도 없게 된 어르신을 잃은 이 참담한 슬픔을 어찌 달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부르시면 누구나 가야하는 길이긴 하지만 100세 시대라고 환호하는 이때에 어쩌자고 그리 일찍 저희들 곁을 떠나셔야만 했는지, 총재님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슬픔과 비통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향년 82세 연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만 값지고 숭고한 참된 삶을 영위하신 전인문 총재님의 족적이야 말로 우리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오래 남을 것이다.
이제 하느님 품안에 고이 잠드시어 평안히 영면하시기를 기구드리며 이 글을 마지막 조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총재님,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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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원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