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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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 남은 달력

2017-12-09 (토)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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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달력 한 장이/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세월인데/ 한 해를 채웠다는 가슴은 내 놓을 게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자고 다 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꼭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를 이젠 어렴풋이 알련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누굴 원망하며 미워합니다.

돌려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을 돌고/ 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 봐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 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시인 오광수의 시 ‘12월의 독백’ 전문이다. 그래 인간은 미래형 아니던가. 내년이 있음에야.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다사다난한 한 해였던 것 같다. 어느 해든 다사다난한 일들이 없었든 해가 어디 있었던가. 원래 세상이 그런 거 아니던가. 시간이 가는지, 세월이 가는지. 지구가 도는지, 태양이 도는지. 새 해가 됐다고 들떠 있던 마음들. 한 해를 마무리 할 때에 와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는데. 그래야지, 하면서 벌써 12월이 되어 있다. 지나간 시간들.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 오광수의 시처럼 욕심을 버리자고 다 잡은 마음이었는데. 욕심으로 가득히 채워진 시간들 아니었는지. 1월에 가졌던 희망차게 좋은 결심과 계획들. 시간이 가며 시들어가고. 초심을 찾자고 하였으나. 세파에 초심도 사라지고.

“해 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한 장 남은 달력 속에 만감이 교차 한다/ 정월 초하룻날 어떤 생각을 했으며 무엇을 설계했을까/ 지나고 보면 해 놓은 일은/ 아무것도 없고 누에 뽕잎 갉아 먹듯/ 시간만 축내고 앙상한 줄기만 남았다. 죄인이다 시간을 허비한 죄인/ 얼마나 귀중한 시간이냐/ 보석에 비하랴/ 금 쪽에 비하랴.

손에 든 귀물을 놓쳐 버린 듯/ 허전한 마음/ 되 돌이로 돌아 올 수 없는/ 강물처럼/ 흘러버린 시간들이 가시 되어 늑골 밑을 찌른다. 천년 바위처럼 세월에 이끼 옷이나 입히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문틈으로 찾아드는 바람이 차다/ 서럽다! 서럽다 못해 쓰리다/ 어제란 명제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가.” 하영순시인의 시 ‘12월은’ 전문이다.

그래 죄인이 어디 꼭 남의 물건을 도둑질해야만 죄인인가. 시간을 도둑질한 것도 죄인이지. 하영순의 시처럼, 금쪽같은 시간. 보석 같은 시간을 도둑질하여 날려버린 죄. 어찌 크다 하지 않으랴. 보이지 않는 시간과 느껴지지 않는 공간, 그냥 흘러 보내고. 다시 내년을 맞이해야 할 이 시기. 12월의 달력 한 쪽이 나불나불 된다.
어느 스님의 말처럼 ‘맑고 향기로운’ 시간을 지난 1년 동안 얼마나 지니며 보내 왔던가. 소유하지 않는 비움의 삶의 아름다움을 널리 전하던 스님. 모든 종교인들의 귀감으로 한 평생을 살았던 스님. 채움보다는 비움의 미학을, 무엇보다 마음을 가꾸는 것을 귀히 여겼던 스님의 자취가 이 12월에 새록새록 새겨짐은 어찌된 일일까.

“남은 달력 한 장/ 짐짓 무엇으로 살아왔냐고/ 되물어 보지만/ 돌아보는 시간엔/ 숙맥 같은 그림자 하나만/(중략). 비워야 채워진다는 진실을/ 알고도 못함인지/ 모르고 못함인지/ 끝끝내 비워내지 못한 아둔함으로/(중략). 작년 같은 올 한해가/ 죽음 같은 진한 공허로/ 벗겨진 이마위로 지나갑니다.” 시인 오경택의 ‘12월의 공허’다.

비우며 산다는 것. 초심으로 산다는 것. 쉽지 않다. 그래도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비우며 살아가야 한다. 오경택의 시처럼 비워야 채워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다. 가득 채워진 물 컵. 계속 물을 부어봐야 넘칠 뿐이지 채워지진 않는다. 모든 부부가 모두 신혼의 초심으로 돌아만 간다면 문제 있는 가정은 세상에 없을 거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그래, 그런 거지 뭐. 미래형으로 살아야지. 11개월 동안 잘 못 지킨 것, 분명히 많다. 그래도 지키며 살아온 것도 있으리. 시간 도둑질 하는 죄인이 아닌, 비움의 마음으로 남은 달력 한 장 잘 채우고 새해를 맞이함도 괜찮을 것 같다.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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