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밤, 와인을 마시며

2017-12-02 (토) 경 카발로/은행원· 웨스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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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 자문위원 글마당

이리로 와
보랏빛 입술이 속삭였다
이 밤, 오늘 밤은 찰랑이며 담겨진 깊은 포도나무 숲
마주 보고 앉은 밤의 빛살 속으로
키득거리며 숨어 들어선 닮은 어깨
아무래도 좋은 그릇의 모양새로
새로 태어난 음식이 넘나들고
희미한 램프 불빛까지도 빛나지 못해 안달하며 기대앉은 너의 무릎
비집고 들어선 너의 손길을 잡고
소스라치듯 튀어오르는 투명의 길로 들어가면
널 따라 찰싹대며 갔던 이름모를 계곡이 떠오르고
넌 송이송이 담긴 기억의 담장 너머로 내 이름을 적었지.

이리로 가까이 와
보랏빛 가슴이 들썩였다
날아가 버릴 듯 달삭이는 숨결같은 얼굴
부서지고 깨어진 물빛 같은 찰나로
내 세계로 들어선 온기
그래, 짓물린 소망의 언저리에 두 팔 드리우고
깝질 같은 밤의 평야로 가자
서늘한 시간 잠재우며 온 몸 떨며 우는 밤의 휴식
내려놓은 뜨락 깊숙이 우리 잠시 밤으로 울자

조금만 더 부어봐
그 밤, 서로의 입술이 보랏빛으로 말했다
우리 원한 대로 다 채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금만이라면 상관없는 어느 밤의 이야기
그저 이렇게 앉아 너의 얼굴에 피어날 꽃을 기다릴 뿐이야
어느 밤, 와인을 마시며.

<경 카발로/은행원· 웨스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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