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커튼콜

2017-12-01 (금)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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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이른 아침 자명종 소리보다 먼저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친구는 내 가족의 안부를 묻느라 숨이 넘어갔다. “엄마는 요즘 어떻게 지내셔? 아들과 며느리는 자주 만나? 남편 건강은 많이 좋아졌다면서? 너는 지금도 열심히 운동하고 있겠지?”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던 친구에게 말 한마디를 어렵게 건넬 수 있었다. “그래, 그래. 너도 잘 지내고 있지?”

친구는 며칠 전 여든을 훌쩍 넘긴 친정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다고 한다. 쾌활한 성격의 친구는 금세 풀 죽은 목소리가 되었다. 막내딸인 친구는 사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친정어머니를 보내 놓고 마음이 놓이질 않아 매일 출근하듯 찾아뵌다고 한다.

나 역시도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정어머니를 일주일에 한 번 뵈러 간다. 친정어머니는 오랜 병원 생활로 다리에 힘까지 빠져 거동이 불편하다. 딸을 배웅하기 위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엘리베이터까지 따라나서는 친정어머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여 나는 애써 웃음을 짓는다.


세상과 이별하는 이들의 소식을 자주 듣는다. 예전에는 나를 비롯한 모든 이의 죽음에 대하여 의미를 두지 않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요즘은 나의 지난 세월보다도 적게 남은 세월의 길이와 무게를 가늠해 보게 된다.

컴퓨터를 검색하다가 오래전에 올라온 예술의 전당 ‘솔리스트앙상블’ 공연을 만나게 되었다. 몇몇 아는 성악가가 보여서 반가웠다. 서리 하얗게 내려앉은 반백이 되었지만 맑고 우렁찬 목소리가 안기는감동은 여전했다. 귀에 익은 외국곡과 민요, 가곡을 넘나드는 프로들의 열정적인 무대가 있는 그대로 전달되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잡으려 들면 더 빨리 내 곁을 떠난다. 준비한 모든 곡을 화음으로 버무리며 공연은 대미를 장식했다.

예외는 있지만, 공연 뒤에는 언제나 커튼콜이 준비되어 있다. 청중들의 그칠 줄 모르는 박수에 퇴장했던 지휘자는 다시 등장하고 한 번, 두 번, 세 번에 걸친 커튼콜도 막을 내렸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멀어져 가는 화면 속 자막위로 친정어머니가 입원했던 병실의 하늘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벼운 커튼 하나 사이에 희비가 오가던 그 추웠던 겨울의 기억에 다시 몸서리쳤다.

위중한 환자들만 있는 병실이라 그랬던지 커튼을 틈새 없이 닫고 치료할 때가 있었다. 담당 의사는 보호자가 그 자리를 잠깐 비워주기를 요구할 때도 있었다. 문 밖에서 커튼 걷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은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양발을 걸치고 있는 절박한 심정의 연속이었다.
“인생은 비빔밥 맛있게 드세요” 라는 책을 출간한 커네티컷 주립대학의 김기훈 교수는 머리말에서 “비관과 낙관, 원망과 소망, 어두운 면과 밝은 면, 불만과 만족, 고생과 안락, 불안과 평안, 병들었을 때와 건강할 때, 굶주림과 배부름 등의 각가지 체험을 통하여 어느덧 낙관적 이념을 택했다”. 라고 기록하였다.

김기훈 교수가 앞서 말한 모든 재료를 다 넣고 버무려 조화를 이루게 하면 맛있는 인생을 만들 수 있다고 하니 내 인생의 비빔밥 그릇에 어떤 재료가 빠져있는지 마음의 창고부터 살펴보아야겠다.

나의 올해의 남은 달력 한 장에 소망을 새기고 감사의 씨앗도 뿌려두기로 한다. 따뜻하게 데운 사랑의 가슴으로 오늘은 친구에게 전화 빚도 갚고 가족과 이웃의 건강을 위해 무릎을 꿇어야겠다. 인생의 무대는 단 한 번의 커튼콜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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