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작년에는…

2017-11-25 (토) 정정숙/전직 공립학교 교사·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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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에 친정엄마가 사경을 헤매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엄마가 화장실을 가시다 방에서 뒤로 넘어지셔서 머리 안으로 피가 흘렀는데 초기에는 CT검사로 미처 나타나지 않아 두 달째 방치되어 더 많은 피가 고여서 뇌를 압박하고 있어 혀가 말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내가 도착하던 날 아침과 그 후, 뇌 안에 고여 있던 피를 뽑아내는 수술을 두 번 받으신 후, 두통에서 많이 해방되고 생명은 구하셨지만 인지장애로 고생하시던 분이라 수술을 받으시니 인지장애 상태는 더 악화되어 어느 때는 딸인 나를 보고도 ‘동생’이라고 부르셨다. 하루 밤에 다섯 번쯤 잠이 깨시는데 평소에도 방향감각이 없던 엄마가 화장실을 제대로 못 찾아다니셔서 내가 모셔다 드려야 했다. 멀리 떨어져 사는 죄송함 때문에 몸이 부스러져라 일한 덕분에 나는 금세 5 파운드나 줄었다. 가뜩이나 저체중인데.

두 딸이 며칠 동안 나와 카톡을 주고받다가 내가 아무리 말려도 한국에서 나를 돕겠다고 따라왔다. 큰 딸은 5, 6년에 한 번씩은 한국에 다녀왔지만,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둘째는 초등학교 마친 후 처음 방문한 것이어서 한국에 오는 것이 26년만이라고 했다.
딸들은 세 주 만에 돌아가고 나는 두 달 있다 9월말에 미국에 있는 남편 곁으로 돌아왔다.
내가 돌아오자마자 남편은 정기 건강검진을 조금 앞당겨 했는데 초기위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남편이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심란해할 때, 한국에 계신 시어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이 왔다. 나만 비행기표를 준비해서 비행기를 타기로 한 날이 채 되기도 전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고 내가 인천공항에 도착할 시각에는 이미 장례식이 끝난 연후라는 이야기를 듣고 비행기 표는 잠시 보유하고 그냥 미국에 남아있기로 했다. 남편은 곧바로 수술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니 남편 곁을 지키는 것이 더 급선무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만 100세의 수를 다하시고 돌아가셨다. 작년에 뵈웠을 때는 다른 때보다 많이 수척해보이셔서 이듬해에 오면 못 뵐지 모르겠는 생각이 들긴 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쉬이 돌아가셨다. 시어머니는 귀가 어두우셔서 물으시는 말씀에 대답하려면 꼭 적어서 보여드려야 했는데 작년에는 어머니 방에서 어느 때보다 짧게 머물렀다.

지친 상태에서 필답이 내키지 않아서이기도 했겠고 어머니에게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보기가 민망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단 하나 위로되는 것은 딸들이 와서 어머니가 몹시 기뻐하셨던 사실이다. 외할머니를 돕는 엄마를 돕겠다고 잠시 직장을 접고 한국에 다녀온 딸들이 결국 친할머니께 크게 효도를 한 셈이 되었다.

맨하탄 슬로운 캐터링에서의 남편도 수술이 잘 되었다. 복강경으로 위암 절제수술을 받긴 했지만 수술 받던 날, 남편은 오후에 링거줄을 끌고 병원 안을 걷기 시작해서 나와 의료진을 놀래 켰다. 도무지 환자 같지 않은 건강한 남편으로 인해 나는 기분이 나를 듯 좋았고 딸들은 그런 나에게 ‘아빠는 암수술을 했는데 엄마는 철이 없이 명랑하다’는 핀잔을 해댔다. 딸들의 불평도 즐겁게만 들렸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의 깊은 사랑을 새삼 확인하며 위안을 받는 듯싶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달도 남편이 수술을 받은 달도 모두 11월이다. 교회력으로는 11월이 마지막 달이다. 나무들이 잎사귀들을 자연으로 돌려주는 때인 11월에는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옷깃을 여며야 하는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생, 더더욱 사랑하기 위해 며칠 후에는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정정숙/전직 공립학교 교사·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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