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1월의 나무로 비탈에 서다

2017-11-24 (금) 최동선/ 전 커네티컷 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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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하루가 멀다하고 비가 내리더니 창 너머에 기대 선 나무들이 눈에 띄게 앙상해졌다.
수액마저 모두 뱉어내는지 지나가는 바람에도 서걱거리며 창문을 두드린다. 겨울을 예감한 자작나무는 어느새 온몸에 시커먼 멍자국을 드러내 보이기시작했다.

얼마 남지않은 잎들은 곧 떨어질 것이고 습관적 아쉬움은 점점 무감각해질 것이다.
한 계절이 가고 새 계절이 오는 당연한 순환을 허둥지둥 따라가며 올 한해도 시간은 나에게 너그럽지 않았었음을 느낀다.

겨울, 그 언 강을 건너가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장 단촐한 몸이 되어버린 11월의 나무에게서 삶의 결연함을 본다. 그 나무를 보며 내 인생의 계절은 어디 쯤일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고, 그것이 가을의 어느 한 정거장을 지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왠지모를 허무함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혔다.


그래도 어느새 성년이 된 아이들을 생각하면 풍성한 수확을 거둔 셈이니 이만 하면 감사할 일이라고 위안을 삼기로 한다.

지난 주말, 모처럼 수도원을 방문했다. 맵지않은 바람과 나직한 기도소리가 머무는 수도원을 천천히 돌아보며 처음보는 이들과 나란히 앉아 서로 다른 기도를 바쳐도 좋은 날이었다. 한적한 산 기슭을 오르는 수사를 만나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걸어 볼 참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말을 건넨다면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따뜻한 커피라도 한잔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난 수사의 빈 가방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가진 것은 수도복 한 벌과 최소한의 것을 담아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작고 낡은 가방이 전부라고 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빈 가방이 11월의 나무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루의 짧은 외출에도 포기하지 못한 커다란 카메라와 간식거리를 담아온 내 묵직한 가방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얼마나 많은 짐을 챙겨들고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일까. 한때는 언 강을 의연하게 걸어가는 나무를 닮아보고자 했으나 내려놓지 못한 보따리 안에는 찌그러진 겸양과 상처받은 배려, 얼룩진 좌절과 버리지 못한 회한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막상 버리지 못한 것들은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견고한 성을 쌓고 섬을 만들어 나를 가두고 있는 것같다. 빈 나무의 결연함을 아직 배우지 못하였으니 엄동 추위에 면역함이 없는 나는 온몸으로 멍을 받아들여야 할 지도 모르겠다.

기울던 해가 손 벌린 나무가지에 아직 걸려 있음에도 초겨울의 저녁은 쉽게 어두워져 공연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빛을 등진 검은 나무들이 중년의 뒷 모습과 닮은 듯하여 안쓰럽다. 끈적했던 시간들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말라 서걱거리고 가난한 마음은 이미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몸에서건 마음에서건 물기가 말라가는 것인가 보다. 잠시 멈추고 발밑을 보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비록 상실의 숲에 갇힐지라도 11월의 나무처럼 의연하게 마주서서 이 겨울을 건너야겠다.

<최동선/ 전 커네티컷 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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