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많은 감사함’

2017-11-21 (화) 나 리 /간호사
크게 작게

▶ 웨체스터 칼럼

기온이 내려갈 무렵이면 동네 빈 가게에 핼로윈 가게가 들어서고 그러면 핼로윈에 무슨 옷을 입을지, 어디서 파티를 할지, 누구와 treat or trick을 갈지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그렇게 10월을 보내면 어느 새 11월이 시작되고 가게에는 터키 주문에 관련된 안내서가 붙고, 다가오는 추수감사절 저녁 초대를 위해 친구들과 서로의 계획을 묻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날인 그 다음날, 블랙프라이데이를 위한 샤핑 계획까지 세우기 시작한다.

이것이 여태껏 내가 지내온 10월과 11월의 삶이다. 미국에 살기 때문에 핼로윈을 즐기고 미국인처럼 퍽퍽한 터키를 먹고, 의례히 블랙 프라이데이 쇼핑을 즐겼다. 하지만 올해는 좀 다르다. 건강을 생각해서 사탕을 사지 않았고 징그러운 해골과 좀비로 집을 치장하는 것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가오는 추수 감사절을 제대로 맞이하기 위해 매일 매일 감사함을 챙기고 있다.

감사함으로 삶의 중심이 옮겨진 건 내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고 난 뒤다. 몸의 이상으로 인해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잘나서 직장을 구했고, 내 열심으로 자격증을 딸 수 있었고, 내가 기회를 잘 잡아서 좋은 동네에 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다. 취업을 위해 최고의 추천서를 써준 직장 상사가 있었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 같이 격려하며 공부했던 동료들이 있었다. 한국 유학생이 없는 학교 생활에 홀로 잘 버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학교가 달라도 유학생 부인이라는 공통점으로 항상 날 챙겨준 친구들이 있었다. 미국에서 홀로 입덧과 싸우며 애를 낳은 줄 알았지만 임신을 했다는 소식에 축하한다며 맛난 동치미 국수를 사준 선배 등 많은 사람이 존재했기에 내가 잘 지내왔음을 각성했다.

추수 감사절의 유래가 황량한 미국 땅에서 추수를 거둘 수 있는 감사함에 시작된 것 같이, 아무것도 없던 나의 미국생활에 수많은 사람과 관계 속에서 지금의 삶을 거둘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11월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감사함을 적극적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적용을 해본다. 매일 가족의 삶을 담당하고 있는 남편의 어깨와 잘 먹고 잘 자는 사춘기 아이의 건강함에 감사한다. 산책하며 만나는 아름다운 가을의 낙엽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격한다. 만날 때 마다 항상 즐거운 동네의 강아지 엄마들과 인연을 소중히 아낀다. 중년 아줌마이지만 운동함에 어머니라고 봐주지 않는 태권도장의 십대들에게 항상 고맙다.
이런 많은 감사함을 되새김질하다 보니 몸이 아파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넘쳐나는 감사함으로 나만 아프다는 억울함과 불안함을 이겨낸 듯하다. 터키가 맛이 없고 가족이 없어 외로운 미국의 추수감사절일지라도 내 인생의 감사함을 찾아 삶의 기쁨을 채우는 의미 있는 명절이 되길 응원한다.

<나 리 /간호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