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누가 누구를 억압하는가?

2017-11-17 (금) 김갑헌/ 맨체스터대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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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레미제라블 (Le Miserable)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옛기억을 더듬으면서 이곳 저곳을 순서 없이 읽다가 과연 누가 누구를 억압하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커다란 그림 속에서 압제세력이 누구인지는 확실 하다.

절대왕정과 귀족과 지주와 부패한 관료들이 대다수의 국민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역사의 기록들이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 큰 그림속에서 벌어지던 작은 부분들을 돌아보면, 생각하지 않던 잔인한 폭력이 억눌린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기회가 오면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보다는 억압하고 수탈하는 본능이 있는 것 일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련한 여인 환틴 (Fantine)은 어린 딸 꼬제트 (Cossette)를 여관집에 맏겨 놓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게 된다. 여관 주인은 어린 꼬제트를 인질로 삼고 구박하며 감당하기 어려운 양육비를 갈취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환티처럼 가난하고 억눌린 처지에 있지만 환틴을 동정하거나 돕기 보다는 그를 따돌리고 억압하고 비난하며 결국 공장에서 쫒아내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혁명이라는 거대한 폭력이 휩쓸고 지난간 자리에 버려진 무수한 희생자들은 그들이 없애려던 세력에 희생이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에게 희생이 되었다는 역사의 모순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혁명이라는 큰 그림을 떠나서 우리 주변을 살펴보아도 비슷한 비극은 헤일 수 없이 많다. 고부갈등이라는 말을 요즈음 젊은이들이 아는지 모르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을 말한다. 새로 들어온 며느리를 구박하고 마치 노예처럼 부리는 것 인데…, 젊은 시절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그대로 다음 세대에게 복수하듯이 반복하는 심리는 어떤 것이었을까?

남자들이 모인 곳에 가장 요란한 경험담은 단연 군대에 있을 때에 겪은 무용담(?)인 듯 하다. 대개 악질 고참에게 밤마다 몽둥이로 두드려 맞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는데, 자신이 고참이 되었을 때 어떠했는지에는 별로 말이 없다. 우리 사회속을 살펴보아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흑인들이 모여사는 지역의 범죄나 살인율이 다른 곳 보다 훨씬 높은 이유는 흑인들이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흑인들을 돕고 선한 이웃으로 같이 살아가기 보다는 그 정반대의 길로 가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처지가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우월한 처지에 있을 때,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 가난한 노동자가 혁명의 선봉이 되고 지도자가 되었을 때, 야당이 여당이 되었을 때,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앞에 두고 있다. 아랫 사람을 돌보는 관용, 어린 며느리를 자식에게 베풀던 사랑으로 감싸는 따뜻함,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함 보다는 가난하고 눌린자들의 상처를 돌아보는 인자함, 야당시절 가슴에 품고 품었던 울분을 다 삭이고 정적을 기꺼이 용서하고 포용하는 만델라 (Nelson Mandela)의 원대함이 그 한 길이요, 억누르고 구박하고 탄압하고 허황한 구호를 앞세워 정치보복을 되풀이하는 부끄러움이 또 다른 길 이다. 누가 누구를 억압하는가?

컴패션 (compassion)이라는 영어 단어는 “함께 (com-) 고난을 받다 (passion)”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레미제라블을 다시 읽으며 그래도 희망을 갖는 것은 압제자들을 용서하고 억압 받는 자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억압 받던 소수가 있다는 믿음이다.

<김갑헌/ 맨체스터대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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