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갈색 머리

2017-11-03 (금)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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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내가 중학교 다닐 무렵 장발 머리를 한 통기타 가수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통이 넓은 바지를 입은 그들은 길거리를 청소하듯 쓸고 다녔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흘러내린 머리를 아무 데서나 쓸어 올렸다. 우중충한 교련복 차림에 비딱하게 쓴 학생모가 그 시절 남자 고등학생들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우리는 학교수업이 끝나면 곧장 떡볶이집이나 튀김집을 찾았다. 마주하는 재잘거림은 풋풋한 꿈을 영글어가게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신촌의 대학가 부근에 있었다. 데모대의 격렬한 시위현장에는 매운 최루탄 가스가 난무했다. 시대의 아픔을 어린 눈으로 직접 체험했다.

살아가기가 막막하던 시절에는 아들에게만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허리 휘는 노동과 살림 밑천인 소를 팔면서까지 공부를 시켰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딸자식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사촌 언니는 여동생과 함께 집안의 희생양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아들 셋을 가르치느라 딸 둘은 중학교까지만 마치게 했다.


공부 욕심이 많았던 사촌 언니는 몇 번이나 부모에게 대들었다가 집안에 감금당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공부도 안 시켜주면서 왜 나를 낳았냐고 따져 묻기도 하고 반항의 뜻으로 검은 머리를 맥주로 감아 갈색 머리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공부가 아니면 미용기술이라도 배워서 도시로 나가고 싶다고 조르면 남의 머리를 만지면 팔자가 세진다는 말과 함께 살림 잘하는 법을 배워서 시집이나 가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부모님의 그때 말씀을 생각하면 사촌 언니는 지금도 눈에 눈물이 고인다고 했다.

사촌 언니는 성남에서 미용실을 운영한다. 나는 한국에 나갈 때마다 사촌 언니 미용실에 들러서 머리를 손질한다. 손질이 급하지 않으면 기다렸다가 사촌 언니에게 내 머리 손질을 맡긴다. 딸의 고집을 센 팔자에 넘겨주기 싫다며 끝까지 미용학원에 보내지 않았던 큰어머니가 세상을 등진 이듬해에 나이 오십을 넘긴 사촌 언니는 종업원을 거느린 미용실을 갖게 되었다.

미용기술이 뛰어난 사촌 언니의 미용실은 아낙들로 붐볐다. 가위를 든 사촌 언니가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이야기했을 때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구수하고 끈적 하기까지 했다.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는 사촌 언니의 표정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사촌 언니는 화요일이면 가게 문을 닫고 등산을 한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니 하루해가 짧고 집안 살림에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된다고 했다. 내가 우스갯소리로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을 때 사촌 언니는 지금껏 배우지 못한 한을 내려놓지 못했던지 “나를 잘 가르쳐 놓았으면 대통령도 했을 텐데.”라는 말을 꺼내며 눈시울을 적셨다.

부족함이 없어도 범죄를 저지르고 물질과 정신적 소산물이 차고 넘쳐도 불평을 말하는 요즘이다. 자라는 세대를 어떻게 이해시킬지가 걱정이다. 부족한 가운데서 행복을 찾고 내일 향한 꿈을 키워나가야 할 텐데 말이다.

시월도 막바지에 이르러 바깥기온이 급강하하니 통기타에 음률 실은 따끈한 튀김집 골목이 그리워진다. 빈 그릇이 무엇으로든 채워지기를 고대하며 마음 졸이던 그때가 지금보다 행복하게 다가오는 오늘이어서 그런지 불현듯 사촌 언니가 보고 싶어진다. 머리에 맥주로 갈색 물들이던 그 가슴 아린 날들을 잊지 못한 사촌 언니는 미용실 출입문 위에 ‘갈색 머리’라고 쓴 큼지막한 간판을 지금도 내걸고 있다.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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