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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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나들이

2017-10-27 (금) 최동선/커네티컷 전 한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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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컴퓨터에 로그인 하며 ?밤새 닫혀진 나의 세계에 세상 밖 소식을연결하는 첫 번째 의식을 치른다. 창 안에 갇혀 창 너머의 세상을 동경하던 어떤 영화의 주인공처럼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막연한 희망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10월이 중순을 넘어 설 때 까지가을은 좀처럼 얼굴을 내밀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집 주변의나무들은 더디지만 천천히 붉은옷으로 갈아 입으며 시간에 순응했고, 앞 뜰의 키 작은 국화꽃은심홍색 피를 토해 내며 가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알려 주었다.

한낮의 기온은 여전히 70도를훌쩍 넘어선 무더운 날씨 임에도 선뜻 반 소매 셔츠만 입고 나서기가 망설여 지는것을 보면 어느새 계절은 경계를 허물며 다가와 나를 물들이고 있었나 보다.


은은한 속도로 반 씩 양보하고반 씩 물들며, 그렇게 밤의 길이만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속도로 가을이 왔다. 가로수의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맑게 빛나고,제 할 일을 다한 잎들은 길 위로내려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발걸음을 붙잡는다. 숲을휘젓고 내려온 바람도 비로소 낡은 지붕 위에서 이름을 갖게 되었다.

모처럼 가을 나들이에 나섰다.

고즈넉한 산길을 걸으며 애써 외면했던 마음 속 젖은 자리에 머물기도 하고, 빈 가지로 선 나무에 기대어 실눈을 뜨고 하늘을바라보기도 하며 넉넉한 한나절을 보냈다. 풀 숲 사이로 이어진길을 걷다 뒤를 돌아 보면 내가걸어 온 길이 까마득 하게 멀리있고, 그 길을 따라 올라 오는 사람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앞서 간 누군가의 그림자를 따라 열심히 걷고 있었다. 문득 오래전 책에서본 한 줄 글이 떠올랐다. ‘그것은 준비된 길이며 내 앞에 펼쳐진 한 줄기 길이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자신의 길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라는 말로 이해했었다. 스스로 곧고 편안한 길이라고 선택한 길을 걸으면서도 타인과 비교하는 순간 자신의 길이유독 굴곡진 길로 보일 수 있음을 경계한 말이리라. 잠시 숨을고르며 발 밑으로 펼쳐진 산자락의 고운 풍경에 외마디 감탄사를 토해 내며 그 순간을 사진에담아 기억해 두기로 한다. 움켜쥐고 놓지 못했던 상념들은 나도모르는 사이에 가을 바람을 따라 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영화“남한산성’을 보았다. 병자호란당시 청의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와 신하들이 청에 맞서자는 척화파와 화의를 맺자는 주화파로 갈려 대립하다가결국 임금이 삼전도로 내려가 청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를 함으로써 온전히 적앞에 무릎을 꿇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김훈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역사는 영광과 자존뿐 아니라치욕과 모멸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최명길이 가고자 하는 길은 삶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라고말하는 김상헌과‘ 삶의 길 이라면 길을 열어야 삶이 이어질 수있다’ 는 최명길의 엇갈린 주장에서 결국 최명길이 연 길 위에치욕을 남긴 47일간의 전쟁은 끝을 내게 된다. 역사에서 가정은없다지만 김상헌의 주장을 따랐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영화를 보고 다시 허드슨 강을 건넜다. 가을도 강을 건너고있었다. 우리는 날마다 이렇게견디며 건너가고 있는 중이다.

<최동선/커네티컷 전 한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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