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의 선물

2017-09-27 (수) 여주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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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선 과수원에 능금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게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傷(덧말: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하늘을 푸르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 김현승의 시 ‘가을의 향기’가 생각나는 절기이다.

세상이 아무리 급변해도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변함없이 순환하고 있다. 올 가을도 야외로 나가면 어김없이 나무에 주렁주렁 사과와 복숭아, 포도가 매달리고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들꽃이 죽지 않고 의연하게 모습을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이 그냥 바라만 보아도 즐겁고 행복할 일이다. 교외로 나가면 발걸음마다 가을의 소리, 가을의 향기가 그윽하다. 길가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코스모스, 형형색색의 향기로운 국화꽃들이 우리를 반긴다.

하지만 마음은 왠지 편치가 않다. 한반도가 금세 불바다로 변할 것 같은 북미간의 끔찍한 기 싸움이 연일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연이은 핵미사일 실험 발사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사이에 오가는 말 폭탄은 당장이라도 한반도에 전쟁이 날듯 위험한 수준이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꼬마 로켓맨’이라 부르며 “북한을 완전 파괴할 수 있다.” 혹은 ‘미치광이’라고 독설을 퍼붓자, 김정은도 트럼프에게 곧바로 ‘늙다리 미치광이’라는 말로 맞받아쳤다.


또 미국이 한반도 상공에서 전략폭격기 훈련을 개시하자 북한은 영공을 안 넘어도 선전포고로 간주한다며 격추하겠다고 응수,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돈다. 그 탓에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가을에 풍요는커녕, 마음이 어둡고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이 가을의 풍성함을 누리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인도에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을 할까’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할까’를 스스로에게 묻도록 하라는 격언이 있다. 그리고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면 나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도 함께 사라지는 거라고 생각하라고 하였다.

성큼 다가온 가을은 생각을 주렁주렁 열게 하는 풍성한 계절이다. 어수선한 세상 탓도 있지만 아침저녁 기온이 점점 떨어지면서 모든 것이 움츠려들고 마음이 스산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때 우리 인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태어났고 생각하기 위해 살고 있다. 인간은 한시도 생각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고 갈파한 프랑스의 심리학자 파스칼의 말처럼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라는 명언을 남겼다. 인간은 누구나 한순간도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러기에 평생 그 수많은 생각중에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매순간 자신의 일상을 음미하며 살 수 있는 것도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커다란 축복이자 특혜이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자신의 생에 대해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고백했다. 아무리 권력과 명예를 가졌지만 결국에 가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시간에 휩쓸려 살아온 자신의 생에 대한 후회가 담긴 말이다. 이런 탄식이 나오지 않으려면 이따금 멈춰 서서 자신의 생에 대해 한 번씩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가을은 풍요함과 허전함,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태어남과 소멸 등이 다 들어있는 의미있는 계절이다. 지금같이 혼란스런 세상에서 나의 힘든 마음을 꽉 붙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색이다. 창밖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걸어온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깊은 사색에 심취해볼 수 있는 것은 이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juyoung@koreatimes.com

<여주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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