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처가 죽자 혜자가 조상하러 갔다. 장자는 그 때 항아리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혜자가 말했다. 함께 살았고, 자식을 길렀으며, 함께 늙었다. 그런 부인이 죽었는데 곡을 안 하는 것도 모르겠거니와, 거기에 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장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처음 죽었을 때야 나라고 어찌 슬픈느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이전을 살펴보니 본시는 삶이 없었던 것이었고, 형체 조차도 없었던 것이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본시 기조차도 없었던 것이었다.
기가 변화하여 형체가 있게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가 또 변화해 죽어간 것이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변화였던 것이다. 하늘과 땅이란 거대한 방 속에 편안히 잠들고 있는 그의 죽음을 따라서 곡을 한다면 천명에 통달하지 못한 짓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장자 지락(至樂)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변화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도교는 자연의 모든 현상을 음양의 두 기운이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죽음에 대하여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가는, 매우 중요한 명제이다. 사의 세계관은 신화나 예술, 문학이나 철학 등의 각종 관념이나 발상의 모태가 된다. 죽음을 열반으로 보고 영원한 생명의 출발점으로 본 불교,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기독교 외의 타 종교에서 사의 세계를 살펴보려한다.
힌두교는 업(業)에 의한 윤회설을 주장한다. 힌두교 특징 중 하나는 죽음의 순간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임종시에 지니는 염원과 자세가 죽은 사람의 내세를 결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바로 종교의 존재근거이며, 그것이 없으면 종교는 그 타당성을 상실할 것이다.”라고 ‘라즈니쉬’는 말한다.
유교의 죽음관은 제사의례에서 가장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제사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중요의례이다. 사자는 제사를 통해 삶의 현실 속으로 들어오고 산자는 제사를 통해 망자와 삶을 공유한다. 유교에서는 사람은 죽으면 혼백이 분리되어 백은 지하(황천)로 가고 혼은 하늘로 간다고 한다. 하늘로 올라간 혼은 조상신이 되어 후손들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다.
이슬람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이 죽음이 끝이 아니고 알라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본다. 알라 신이 삼라만상의 운명을 정한다고 믿는 무슬림은 죽음의 문제도 알라의 무한한 능력 안에 있는 것을 믿는 종교이다.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최후 심판일을 기다리게 되며, 그때가 되면 죽은 자들은 부활하여 살아있을 때의 모습으로 알라신 앞에 서게 되고, 그 심판의 결과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집트 사자의 서( 死者의 書)에서는, 고대 이집트인에게 ‘죽음’은 맡겨진 임무에 대해 평가를 받는 법정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가 소멸할 때까지 거주하다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며, 만일 그가 지상에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면, 그의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고 믿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정교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믿었다.
‘티베트 사자의 서’라고 번역된 티베트불교 경전의 본래 이름은 ‘바르도 퇴돌(Bardo Thosgrol)이다. 그 의미는 ‘사후 세계의 중간 상태에서 듣는 것 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바르도’는 둘 사이를 의미하는데, 이승, 저승 사이 곧 사람이 죽은 다음 다른세상에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중간 시기를 말한다. 그 기간을 49일이라고 하며, 망자 귀에 이 ‘퇴돌’을 읽어주는 전통이 있다.
죽은 혼령이 정화를 거쳐야 맑고 깨끗한 저승으로 간다고 믿는다. 성속일여의 사상과 함께 이승과 저승 사이에 구천을 두어 저승으로 가지 못한 혼령이 떠도는 곳이라고 하였으며, 그 혼령은 이승에도 영향을 줌으로 혼령정화를 통해 저승으로 보내야 한다고 믿었다.
약 12만년 전부터, 유일하게 장례문화를 갖고있는 인류! 삶과 죽음이 자연현상의 하나라고 ‘장자’가 아내의 죽음앞에서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했다하나, 고귀한 생명과의 이별의 엄숙한 제례는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틀이며 문화 창출의 동력이다.
생명과 죽음이 경시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있다. 칠월 한 여름, 인간문명이 지금까지 지켜온 통과의례를 소중하게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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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남/변호사·15대서울대미주동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