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9월의 노래

2017-09-22 (금) 최동선/전 커네티컷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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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팔월의 태양이 늦은 저녁까지머물던 뒤뜰 위에 그림자가 깊어졌다.

기울어진 빛의 크기만큼 바람이채우고, 여름 내내 제라늄 화분이놓여 있던 자리는 보라빛 국화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었다.

해마다 화분에서 제 몫을 다한국화를 묻어 두곤 했던 마당 끝에도 자주빛 꽃망울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더러는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어 다음해의가을을 만나지 못하지만 뜨거운태양이 물러가면 지난해 숨겨 놓은 국화 꽃들이 제일 먼저 가을을맞이한다.


나는 오늘 그 자리에 서서 아직 여름에 머물러 있는 것들과 아주 잠깐 눈인사를 나누었다. 시작은 끝으로 가고 끝은 다시 시작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순환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지난 주말에는 지인의 결혼식에다녀왔다. 어린 나이에 혼자 몸으로 이 땅에 흘러 들어와 정착하는동안 모진 풍파를 함께 겪어 낸두 젊은이가 마침내 부부가 되는날이었다.

당시 내가 아는 대다수의 히스패닉계 젊은 이민자들이 그러했듯 함께 살며 아이를 낳고도 모국에 있는 각자의 가족을 부양 해 가며 생활하느라 결혼식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였다.

어린 나이에 준비 없이 부모가되었기에 아이에 대한 애틋함도 부모로서의 책임감도 모르고 첫아이를 키웠다고 했다. 그들이 뒤늦게얻은 딸을 보며 결혼을 결심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여느 가난한 이민자들이 겪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기쁜 마음으로 참석한 그들의 결혼식은 참으로 소박했고 리셉션은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초라했다. 빈곤한 도시의 후미진 골목길에서 피로연이 열린 만한 건물이눈이 띄지 않아 당황했었다.

그러나 오래되고 남루한 건물의 지하에 들어선 순간, 알록달록한 조명 아래 풍선 몇 개로 꾸며진 그 아름다운 축하연에 감동했다. 그들을 축하하러 온 하객들도그들보다 형편이 나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의 행복한 얼굴은 내가 본 여느 결혼식의신부들과 다르지 않았다. 가진 것이상으로 욕심내지 않고 살아가는그들의 소박한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문득 최근에 읽은‘ 힐빌리의 노래’ 가 오버랩 되었다. '힐빌리'라는말은 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 벨트 지역에 사는 가난하고소외된 백인 하층민을 가리킨다는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힐빌리 출신인 이 책의 저자 J.D밴스가 가정 폭력과 가족해체, 극심한 가난이라는 현실과 마주하며느낀 좌절을 딛고 예일대 로스쿨을커쳐 실리콘 밸리의 사업가로 성공하기 까지의 과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저자의 성공에 환호하기 보다는 그가 탈출한세계에 대한 연민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아팠다.

서재 한편에 놓여 있는 오래된흑백 사진에 눈길이 머문다. 여행중에 지나가던 도시의 풍경을 담아 둔 사진인데 다리 공사를 하는인부들과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입은 채 식사 준비를 하는 여인들, 그리고 그 여인의 치마끈을 잡고 아이가 사진 속에서 울고 있다.

사진속 인물들이 책에서 본 '힐빌리'인지, 결혼식에서 만난 가난한'이민자' 인지는 모르겠으나 서로 배척하지 않고 더불어 사는 삶이기를 바란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9월의 풍경에서 그 너그러움을 배웠으면 좋겠다.

<최동선/전 커네티컷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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