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씻어난 이(聖人)

2017-09-09 (토) 이경희 /수필가·포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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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여러 선생님들과 그룹을 지어 하버드대학을 다녔던 김천배 선생님을 모시고 YMCA에서 공부했던 생각이 문득 새롭다.

이런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그 시절 우리 그룹은 성경공부(예수의 생애: 김천배 지음, 흔들리는 터전: 부버 지음, 김천배 번역)도 했고, 노자, 도덕경 상, 하권 81장을 [늙은이]라고 풀이한 유영모 선생의 번역본을 가지고 열심히 토론하고 공부했었다.

이 때 [늙은이] 81장 중에서 聖人(성인: 씻어난 이)은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특히 유영모 선생님의 풀이는 위로부터 온 얼(모는얼)에 마음이 씻겨진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2장, 34장, 66장, 78장에서 자세히 나옴)


그 뿐 아니라 그 당시 유명한 선생님들을 거의 모시고 철학 강의를 들었던 일이 빌미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 5.18때 제자들은 죽어 가는데 우리 선생님들이 검은 리본을 했다고 국가 정보기관에 찍혔던 일, 미국 시민권을 딴 동생에게 초청이민을 신청하라고 했던 일, 결국은 동생의 초청으로 중.고등학교 국어선생을 팽개치고 1985년에 미국 이민길에 오르게 된다.

두 번 다시 교사는 안하겠다는 결심을 한 나에게 이곳 미국 땅에서도 지상사 주재원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고, 뉴저지 한국학교에서 교사로서 우리 2세들의 국어와 정체성을 일깨워 주고, 이 후 뉴저지 한국학교의 교장, 동북부 지역 협의회 회장을 거치면서 한 길을 걸어 왔던 일들을 생각한다.

도시에서 태어나 밥 한 번 내 손으로 지어보지 못한 채 시집갔었던 나를 미국까지 인도하여 지금은 딸네 집 살림을 맡아 하도록 맡기셨으며, 딸 네 집 뜰 담벼락 밑에 작은 밭을 일구어 깻잎, 고추, 토마토를 심고, 노고 끝에 얻은 우리 조상의 農者 天下之大本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주님의 오묘하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설거지를 해야 한다.

쓸고 닦고 물기 하나 없이 깨끗이 하면서 씻어난 이(聖人)를 생각한다. 나는 하루종일 물속에서 산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자리를 좋아하는 물, 강한 쇠나 돌을 썩히고 녹이는 물, 최상의 선(善)인 물,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는 물, 자신의 유약(柔弱)으로 강강(岡强)을 파괴하고 패배 시키는 물, 이 하나님의 소리인 물소리를 들으며 때론 피곤하지만 이 일에 보람을 느낀다.

딸은 오늘도 야근으로 늦는 모양이다. 내일 도시락 반찬은 뭘 할까 고민이다. 호박전을 부칠까, 오뎅을 만들까... 나의 이 고민을 딸이 조금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바쁘게 몸을 움직인다.

<이경희 /수필가·포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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