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바람이 서늘해졌습니다./ 결실을 준비하는 계절.../ 우리 곁에 벌써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다짐했던 수많은 계획들을 이제 하나씩 결실을 맺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태주의 시 ‘가을서한’이다.
가을이 되면서 이제 곧 사방에 오곡백화가 무르익고 달고 맛있는 과실들이 주렁주렁 달려 우리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하지만 약100년전 이맘때 대한제국의 가을은 어땠을까 불현듯 생각해보게 된다. 당시라면 불과 열흘 전인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되는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른 바 일본통감 데리우찌와 조선의 내각총리 이완용에 의해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으로, 부끄러운 이 날을 우리는 경술국치일이라고 부른다. 한일병합 조약 제1조에는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 날 새벽부터 구슬피 내리는 가을비는 한민족의 눈물처럼 삼천리강산을 적셨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거리에는 망국의 치욕문이 붙었다. 학생들은 밥도 못 먹고 온종일 눈이 붓고 목이 쉬도록 통곡했다. 하지만 조약체결에 앞장선 이완용 등 친일파 75명은 일본으로부터 작위표창과 은사금을 받았다. 그 결과 한민족은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일본에 의해 말할 수 없는 치욕과 수난을 당했다.
또 조선의 앳된 처녀들은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이 모두는 힘이 미약해서 당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조선의 불행한 역사이다. 이로 인해 한민족은 가을을 고통과 슬픔으로 보내야 했다. 약소국이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아픔과 슬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북한동족과 주변 강대국에 의해 우리는 아직도 이 가을의 풍요를 실감나게 맛볼 것 같지 않다. 북한의 초강력 미사일 발사로 초가을 노동절 연휴가 즐겁기 보다는 온통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노동절 바로 전인 3일 발사한 북한의 제6차 핵실험은 미국과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를 포함 국제사회를 온통 긴장으로 내몰았다.
북미 양국사이에 낀 한국의 정치권은 갈팡질팡 온 나라가 연일 시끄럽고 좌불안석이다. 이제 한국은 북한의 핵기술에 따라갈 수 없는 군사력으로 미국의 핵우산에 확실히 들어가지 않으면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신세가 돼버렸다. 유례없는 수준의 이번 북한의 핵실험 강행으로 미국은 “김정은은 전쟁을 구걸하고 있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유사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도 암시했다. 국제사회도 강력 규탄을 하고 있지만 김정은의 불장난을 근본적으로 막을 방도는 쉽게 나오지 않아 보인다.
참다못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막무가내 성격의 북한의 김정은, 둘중 누구 하나 버튼만 누르면 한반도의 가을 밤하늘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하고 대자연이 불바다가 될 수 있는 순간이 당장이라도 눈앞에 펼쳐질 것 같아 불안하다. 북한이 남한을 향해 핵을 쏘면 서울은 최소 300만명이 사망할 것이고 서울의 모든 건물이 잿더미로 변한다고 하니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상황인데도 한국인들은 여전히 흥청 망청이고 젊은이들은 나라가 어찌됐던 상관없이 평화로워 보인다는 것이다. 모두 불과 열흘 전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간 국치일을 까맣게 잊고 지금은 또 북한의 무시무시한 핵공격 앞에 놓여있는 상황임에도 가을이 평생 풍요롭기만 할 것처럼 여유로운 생활이다. 97년전 한국의 가을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하루아침에 어둠으로 변하고 온 천지가 벼락을 맞은 듯 슬픔에 싸였다.
일제치하 시인 윤동주는 가을밤 하늘을 바라보며 ‘별 헤는 밤’을 노래하며 나라 빼앗긴 슬픔을 달랬다. 그후 100년이 다 돼가는 오늘, 고국강산에 만의 하나 전쟁이라도 터지면 이런 노래를 할 시인이라도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나라의 기능이 마비되고 천지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 것인데 무슨 시가 나오고 가을을 노래할 시인이 있겠는가. 참으로 암담한 가을을 보내고 있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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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 주필>